안녕하세요, 금주의 에세이 당번 파주입니다. 짧은 여름방학 끝에 다시 돌아온 풀칠! 쉬는 동안 재충전도 하고 나름대로 리뉴얼을 시도해 보았는데요. 어떤 것이 바뀌었는지, 매의 눈으로 찾아보시면 그 재미도 쏠쏠할 겁니다. 이번 에세이 주제는 '확신'입니다. 저는 성격상 쉽게 확신하지 못하는 편인데요. 이런 성격은 특히나 회사에서 괴롭운 일이 자주 생기기 마련입니다. 식사 메뉴를 고를 때, 기획안의 레퍼런스를 찾을 때마다 길고 험난한 고민의 여정을 걷게 되죠. 물론 조심스러운 게 나쁜 것만은 아니지만요. 매사에 확신이 없다 보니 무엇을 하든 필요 이상의 시간과 노력, 정신력을 소비하고 맙니다. 이번 호에는 확신하지 못하는 인간이 직장에서 어떠한 어려움을 겪게 되는지에 대해 적어봤습니다. 여러분은 일을 할 때 선택지를 쉽게 고르는 편이신가요? 점심 메뉴도 대쪽 같이 고르는 성격이라고요? 그렇다면 참, 부럽네요... 확신하지 말자. 나를 망치러 온 나의 구원자는 얼마 전부터 품은 나의 좌우명이었다. 하필 불확신을 좌우명으로 삼은 이유는 후회로부터 도망치기 위해서였다. 근거없는 확신과 판단으로 그르치는 일이 많았고, 때로는 후회하는 데에만 하루를 꼬박 허비한 날도 있었다. 그릇된 확신으로 후회할 일을 만들지 않기 위해 불확신을 택했다. 불확신은 종종 나에게 있어 만능 쉴드 같은 역할을 해냈다. 확신하지 않으면 불행이 찾아와도 '그럴 수 있지'라며 제법 의연하게 반응할 수 있었다. 반대로 기대조차 하지 않았던 행운에는 곱절의 행복을 느끼기도 했다. '절대'라는 수식어를 붙이지 않으면 입장을 번복하는 흑역사를 만들 일도 적어졌다. 그저 확신이 없던 것뿐인데 때로는 모난 데 없이 성격 좋은 사람이라는 반가운 오해를 받기도 했다. 물론 불확신으로 점철된 하루가 꼭 꽃길만은 아니었다. 확신이 사라지자 사소한 결정을 할 때에도 늘 애를 먹었다. 당장 점심 메뉴를 고르는 것만 해도 많은 에너지를 소비했다. 자그마치 천만 명이 사는 이 도시에는 짬뽕 아니면 짜장면이라는 양자택일이 주어지지 않았으니까. 크게 허기가 지지 않으면 당장 내가 무엇을 먹고 싶은지도 희미했다. 때문에 수십 가지에 달하는 선택지 사이에서 머리를 쥐어뜯게 되는 평일 정오가 늘 고역이었다.
불확신의 늪에 허덕이면서 내가 어떤 것을 좋아하는지도 헷갈리기 시작했다. 취향에 은근히 자부심을 가지던 과거의 망령은 어디로 사라졌는지 모든 것에 '좋죠 좋죠'라는 무의미한 동조만 거듭했다. 회사의 업무를 진행할 때도 불확신은 독이 됐다. A/B안을 준비하면 충분할 것을 자그마치 열 종류의 기획안을 정리하느라 시간을 허비했다. 전전긍긍하느라 기력은 소진됐고 기획안은 당연히 중구난방이었다. 뚝심을 밀고 나갈 의지가 없던 걸까. 아니면 선택지를 추려낼 능력이 모자랐던 걸까. 나의 상황이 불확신과 무능 중 어느 쪽에 가까운지 혼란스러웠다. 상황이 악화되자 이제는 왜 확신이 없는지조차 확신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비극의 2막은 그날부터였다. 회사에서 *태니지먼트 검사를 받고 온 날, 수 백 개의 응답을 통해 나온 결과지가 내가 고장났다는 일종의 선고처럼 보였다. 가장 충격적이었던 건 태도 항목이었다. 자신의 욕구와 인식을 보여주는 12가지의 태도 중 확신이 턱없이 낮았기 때문이다. 확신뿐만 아니라 자신감과 용기까지 바닥에 딱 붙어앉아 있는 걸 보니 있던 열정마저 사라지는 듯했다. 우스꽝스러운 결과지를 보면서 스스로가 꼭 스탯을 엉망으로 찍은 게임 속 '망캐'처럼 느껴졌다. *태니지먼트 : 기반으로 개인의 강점과 재능, 태도 등을 진단하는 검사 그 뒤로 나의 모든 행동의 이유를 테스트에 나온 결과지에 의존했다. 스스로 확신이 없으니 고작 종이 쪼가리 따위를 맹신하게 된 거다. 내가 가진 강점과 약점, 업무 중에 벌인 실수와 사고까지도 죄다 자신감과 용기와 확신이 없어서라고, 마치 엉망진창이 된 일상이 나에게 정해진 숙명 같았다. 확신이 없어 회사에서 저지르는 실수와 무능이 더 잦아졌고 악순환이 길어질 수록 나를 향한 불확신의 뿌리는 깊어졌다. 회사 밖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배달앱을 뒤적이며 메뉴를 고민하거나 편의점에서 캔맥주 4캔을 골라야 할 때도 늘 불확신의 고통을 수반했다. 괴로움은 나에게만 한정되는 것이 아니었는데, 누군가의 마음을 상하게 할까 한참을 망설이며 선택을 유예하는 것이 도리어 상대에게 큰 민폐가 되기도 했다. 애써 잡은 약속을 취소하거나 연기하는 일이 잦았고 약속을 깨자는 연락을 건넬 때마다 스스로를 '최악의 인간'이라며 자책했다. 여러 번 약속을 미루고 나서야 만난 후배A에게 불확신의 늪에 빠진 나의 근황을 전했다. 그러자 A는 자신이 겪은 일화를 처방해 주었다. 새로운 직장에서 기획 업무를 맡은 A가 (이전 직장에서 했던 대로) 자신의 판단을 배제한 기획안을 전달하자, 기획안을 본 PD는 이런 피드백을 주었다고 말했다. "A씨가 평생 조연출만 할 거라면 이렇게 해도 상관없어요. 하지만 저는 A씨의 취향과 안목을 믿은 거니까 기획을 맡긴 거예요." 지금 나의 직장도, 팀원들도 나의 취향과 안목을 믿고 있을까. 그렇다면 매번 확신하지 못한 채 어정쩡한 선택을 하는 게 곧 무능인 걸까. '취향과 안목을 믿어서 맡긴 것'이라는 말을 떠올릴 때마다 '좋다'만 남발하던 내 모습이 꼭 밥값을 하지 못하는 모지리처럼 느껴졌다. 확신과 자신감, 용기 제로의 검사지를 확인한 상사가 농담 삼아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매일 업무일지를 전달하면서 확신도 하나씩 덧붙여달라고. 1일 1확신이라니. 어쩐지 하루에 하나 착한 일을 기록하는 초등생이 된 기분이 들었지만 확신하는 방법을 잊은 내게 제법 잘 드는 처방전이었다. 처음 며칠 간은 확신 한 줄 채우는 게 쉽지 않았다. 엽떡은 언제나 옳다, 월급일 기념 과소비할 거다, 오늘 클라이언트는 A안으로 컨펌했지만 솔직히 나는 B안이 더 좋았다 등등... 허접한 말들을 마구 쏟아냈다. 사소한 것들이라도 꾸역꾸역 하나 둘 채워나가는 게 꼭 재활훈련을 하는 듯했다. 그 덕분일까. 조금씩이지만 불확신의 그늘 밖으로 벗어나고 있다. 오늘은 조금의 고민 없이 점심 메뉴를 주문했고 색깔을 고민하느라 한 달 동안 장바구니에 담아 놓은 운동화도 구입했다. 미세하지만 분명 나아지고 있다. 오늘은 그런 확신이 든다. ![]() 주입된 확신이 불확신보다 해롭습니다. "당신의 취향과 안목을 믿은 거니까 기획을 맡긴 거"라는 말에도 고취되기보다는 경계심을 갖는 편이 좋다고 생각해요. 사실 그렇게 말해준 사람도 언제 돌변할지 모르거든요. 결국 일과 관련된 평가는 결과에 기반해서 이뤄지니 말이죠. 전 일에 대한 칭찬은 결과에 대한 칭찬만 믿습니다. 그마저 100%는 아니고요. 지나치게 방어적인 자세 같지만 조심해서 나쁠 거 없죠. 확신은 책임을 수반하니까요. 공격이 최선의 방어가 되는 경우는 매우 드뭅니다. 뭐… 그 경우를 여러 번 이겨내면 일론 머스크가 되는 거겠죠. 주체적인 태도로 확신을 대합시다. 우린 달에 가지 않고 지구에서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 거잖아요? 어쨌건 확신 없이는 무엇도 끝맺어지지 않을 테니, 결국 나의 취향과 안목을 내가 믿는 연습을 꾸준히 하는 수밖에 없네요. 그런 점에서 하나씩 확신을 덧붙여보라는 처방전은 퍽 마음에 드네요. 저도 해봐야 할 것 같습니다. ![]() 파주님의 의기소침함이 모니터를 뚫고 전해지는군요. 이대로 확신을 영영 잃어버리는 건 아닐까 두려우신가요? 괜찮습니다. ‘확신을 잃어버렸다’는 말은 엄밀히 보면 틀린 말입니다. 확신은 기본값이라기보단 찰나의 감정에 훨씬 더 가까우니까요. 그래도 불확신염려증이 차도가 없으시다면 이런 말은 어떠신지요. 괴테는 “인간은 노력하는 한 방황한다”고 했습니다. 확신이 없다는 건 최선을 고민하고 있다는 방증일 수도 있습니다. 이직한지 3개월은 넘은 것 같은데 아직 안 짤리신 걸 보면...현 직장에서 파주님의 고민을 높이 사고(적어도 지켜 보고)있는 게 아닐까요? 괴테가 너무 진지해서 별로라면 이런 말도 있습니다. ‘무식하면 용감하다.’ 불확신은 겁 없는 쪼랩을 벗어나기 위해 필연적으로 겪어야 하는 성장통인지도 모릅니다. 파주님은 지금 불확신의 시체를 넘고 넘어 이전보다 조금 더 단단한 확신을 향해 가고 계신 것 같습니다그려. 물론 그렇게 가 닿은 다음 확신도 얼마 안가 다시 불확신으로 변하기야 하겠만요. 그래도 계속 반복하다 보면 언젠간 불확신을 능숙하게 다룰 수 있게 될 겁니다. 그렇게 강해지는 거 아니겠어요. 자, 그럼 계속 불확신에 시달려 보아요..! ![]() 실없는 소리를 하고 말았지만 저도 늘 스스로를 불신하고 자책하는 입장에서 고민이 많아지는 글이었습니다. 그래서 함께 나눌 이야기를 찾던 중에 도쿄올림픽에서 양궁 3관왕에 오른 안산 선수의 "쫄지 마, 대충 쏴!"가 어쩌면 확신과 불확신을 가르는 좋은 기준을 제시해 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과녁을 맞추지 못해도 괜찮다는 마음가짐이 오히려 확신을 키워준 셈이니까요. 양궁 과녁은 자유자재로 늘릴 수 없겠지만 마음의 과녁은 좀 나일론이라고 생각해요. 중요한 건 본인이 어느 만큼 확신을 강하게 키우느냐가 아니라 자신의 선택과 결정이 정답이 아니어도 괜찮다고 생각하며 과녁 그 자체를 늘리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그런 점에서 스스로에게 어느 정도 실수와 실패를 허락한다면 우리는 이미 10-10-10인 걸지도요. 파주님, 늘 응원합니다. 엽떡 달리시죠. ![]() "번복에도 용기가 필요하다" ![]() ![]() ![]() 오늘 저희가 보내드린 이야기들, 어떠셨나요? 저희는 여러분의 이야기도 궁금해요. 일하면서 겪은 일, 늘상 끌어안고 있는 고민, 오늘 편지에 대한 피드백 무엇이든 좋답니다. 아래 버튼을 눌러 여러분의 풀칠하는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지난 호에 보내주신 풀칠 품앗이 답장은 여기에서 확인하실 수 있어요! 주간 밥벌이 매거진 <풀칠> 시즌2는 평일의 반환점 수요일에서 목요일로 넘어가는 밤12시에 찾아갑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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