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이다. 여름엔 늘 어떤 옷을 입고 출근해야 할지가 고민이다. 윗도리야 그냥 적당한 반팔을 주워 입으면 그만인데, 아랫도리엔 영 손이 가지 않는다. 청바지? 무진장 덥다. 긴 바지? 너무 덥다. 반바지? 덥다. 어떤 바지를 입더라도 불쾌할 것이 분명한데, 바지를 꼭 입어야만 할까. 그래, 오늘은 바지를 안 입고 출근하기로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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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지를 입지 않은 채 지하철을 탄다. 출근길의 지하철에선 다들 남을 쳐다보는 것이 금지된 일인 것처럼 굴기 때문에 바지를 입지 않은 것쯤은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리고 아침에 바쁘게 준비하다 보면 뭐 하나쯤은 반드시 집에 두고 오기 마련 아닌가. 어쩌다 눈이 마주치는 사람과는 가볍게 눈인사를 하며 텔레파시를 나눈다. 보아하니 집에 사랑하는 사람을 두고 오셨군요. 아하, 그쪽은 집에 정신머리를 두고 왔군요. 아이쿠, 저는 오늘 중요한 미팅이 있어서 일부러 집에 연민을 두고 왔답니다. 아? 당신은 집에 바지를 두고 오셨군요. 뭐, 그럴 수도 있지요.
회사로 들어가기 전엔 매일 아침 들르던 카페에 간다. 일찍 출근한 동료들은 이미 카페에 앉아있다. 우리는 사실 동료라기보단 친구에 더 가깝다. 친구들은 나를 보자마자 나의 새로운 패션을 칭찬했다. 오! 오늘은 아주 시원해 보이네! 카페 사장님도 거든다. 과감하네요! 나는 답한다. 아. 여름이잖아요.
회사엔 평소보다 조금 일찍 도착했다. 바지를 입지 않고 출근해서 일하는 건 처음이라, 뭔가 새로운 출발을 앞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사실 느끼고 있지 못할 뿐 우리 모두는 매일 새로운 사람이 된다. 어제의 세포는 죽어 나가고, 어제의 생각은 꿈속에서 녹아내리고, 어제의 말은 흩어진다. 기억이라는 불확실한 증거와 별로 믿음직스럽지 않은 물건들에 둘러싸인 채로 하루하루를 살다 보니 그 사실을 자주 잊는 것뿐.
하지만 오늘은 <바지를 입지 않는다>는 결정 덕분에 내가 새사람이 됐다는 걸 비로소 직면하게 됐다. 키보드의 타건감이 뭔가 조금 더 좋아진 것 같다. 모니터가 조금 더 밝아진 것 같다. 뭐든 잘 해낼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오전 11시. 실제로 업무 효율이 비약적으로 상승했다. 평소라면 오후까지 붙잡고 있었을 작업을 이미 끝내버렸으니 말이다. 이렇게 생산성이 개선되다니. 챗GPT를 배울 게 아니라 바지를 입지 않는 게 답이었던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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짬이 생긴 김에 커피나 한 잔 뽑을 겸 움직이다 로비에서 팀장을 만났다. 팀장은 내게 뭔가 말을 건네고 싶은 눈치였다. 팀장과 말을 섞는 일은 애지간하면 피하고 싶긴 하지만, 그래도 저렇게까지 눈치를 주는데 먼저 물어보는 게 직장인 된 도리인 것 같아 입을 열었다.
“팀장님, 뭐 하실 말씀 있으신가요?”
“아 오늘 복장이 아주 시원해 보이네요.”
“아 네. 제가 더위를 좀 많이 타서요. 이렇게 입으니까 업무 능률이 올라가더라고요.”
팀장은 머리를 벅벅 긁었다.
“아…네. 회사가 조금 덥긴 하죠.”
“네. 제가 더위를 좀 많이 타서요”
팀장은 눈을 비비기 시작했다. 주변을 두리번 두리번거리다가 심호흡을 크게 하고 내게 다시 말을 건다.
“저 규정상 문제 될 게 없다는 걸 잘 알고 있긴 하지만, 그래도 이 얘기를 하긴 해야 할 것 같아서요. 앞으로 회사엔 꼭 바지를 입고 오셨으면 좋겠어요.”
“아. 네. 혹시 이유를 여쭤봐도 될까요?”
팀장은 다시 머리를 벅벅 긁기 시작했다. 눈도 막 비빈다.
“음. 그러니까…음…아닙니다. 그럼 이만. 화이팅하세요.”
내가 바지를 입지 않은 게 영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 같은데, 뭐라고 할 구실이 없어서 포기한 느낌이다. 찝찝하긴 하지만 회사에선 일만 잘 하면 그만 아닌가. 신경 쓰지 말자고 되뇌며 자리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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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리로 돌아와서 한참 일을 하는데, 업무 메신저가 울린다. 이럴 수가. 당연히 내가 할 것이라고 생각했던 프로젝트를 다른 사람이 맡아서 시작한다는 내용이다. 이건 뭔가 잘못됐다. 설명을 듣고 싶어서 팀장을 찾아갔다. 설마 내가 바지를 입지 않아서일까? 역량이랑은 아무 상관 없는 고작 바지 때문에?
“팀장님. 이번 프로젝트 말인데요. 저는 제가 맡을 줄 알았는데요.”
“음. 왜요?”
“그쪽에선 제가 제일 오래 일하기도 했고, 제일 잘 안다고 생각해서요.”
“음…”
팀장이 내 눈을 피한다. 팀장의 시선이 내 허리춤(보통이라면 바지가 있었어야 할 그 자리)에 가서 멈춘 것 같다.
“혹시 제가 오늘 바지를 안 입고 와서 프로젝트에서 배제된 건가요.”
“음. 그렇다기보단…”
“바지와 역량 사이에 어떤 상관관계가 있는지 저는 이해가 잘 안 갑니다.”
“…”
팀장은 또다시 머리만 벅벅 긁는다. 바지 때문이면 바지 때문이다, 시원하게 말이라도 해주면 좋을 텐데. 답답함을 참을 수 없어서 일단 밖으로 나왔다. 찌는 듯한 여름. 날이 이렇게 더운데 바지를 어떻게 입는단 말인가. 억울해서 눈물이 날 것 같다. 바지를 입지 않은 덕분에 평소보다 출근도 더 일찍 했는데. 일도 더 많이 했고. 정말 이럴 수는 없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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찌는 듯한 더위에도 사무실 아래엔 잠시 바람 쐬러 나온 직장인들이 꽤 많다. 다들 용케도 바지를 입고 있구나. 별 쓸모도 없고 덥기만 한 바지를 도대체 다들 뭘 위해서 입는 걸까. 바지를 잘 챙겨 입은 사람들 틈바구니를 걷다 보니 문득 지독하게 외롭단 생각이 들었다. 바지를 입지 않은 사람을 딱 한 명만 마주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아침에 들른 카페에선 바지 가지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데. 친구들도 멋지다고 해줬는데. 그런데 왜 바지를 입지 않은 사람이 아무도 없지. 이대로 바지를 입지 않은 사람을 찾을 때까지 하염없이 걸을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다.
그때 별안간 비가 쏟아진다. 여름에만 오는 그런 거센 소나기다. 사람들은 황급히 비를 피할 곳을 찾아서 달린다. 모두의 옷이 흠뻑 젖는 게 보인다. 저 사람들은 옷을 다 갖춰 입고 출근한 걸 후회하고 있으려나. 귀를 기울여보지만 빗소리가 워낙 거세 사람들의 속마음은 잘 들리지 않는다. 아니, 애초에 남의 속마음이 들렸던 적이 없었던 걸지도.
사람들이 모두 사라진 거리에서 바지를 입지 않은 채로 비를 맞고 서 있다. 소낙비는 더위와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여름이 왔음을 알려온다. 이런 비가 지나가고 나면 마지막으로 남아있던 봄의 흔적까지 씻겨내려가기 마련이다. 여름은 어떻게 찾아오는가. 푸르렀던 봄이 완전히 끝나버렸다는 자각과 함께 찾아온다. 빗줄기들이 맨 다리를 철썩철썩 후려치며 말한다. 네가 만든 규칙대로 계속 세상을 살 수 있을 줄 알았니. 어림도 없다 이놈아.
내일의 나는 과연 바지를 입고 출근할 것인가. 이 비가 그치기 전에, 나처럼 바지를 입지 않고 비를 맞는 누군가를 마주치지 않는 한, 바지를 챙겨 입게 될 것 같다. 그러면 바지를 안 입은 오늘의 나는 사라지고, 아무리 더워도 단정한 바지를 잘 챙겨 입고 벨트도 잘 차고 다니는 사람으로 거듭날 테지. 기꺼이 땀을 흘릴 각오를 하는 사람이 되느라고 비를 흠뻑 맞으며 서있다. 여름은 이렇게도 찾아온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