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것들이 멸종되는 시대, 가장 시원한 여름 [풀칠 187호]

2024. 7. 17.

안녕하세요, 이주의 에세이 당번 파주입니다.

어제도 오늘도 습하고 더운 나날이 계속되네요. ‘원영적 사고'를 통해 이 무더위를 초긍정적으로 이겨내고 싶지만 말이죠. (가만히 있어도 땀이 잔뜩 나니까 제대로 여름 느낌 나잖아? 생각해 보니 공짜로 흠뻑쇼 온 셈이잖아? 완전 러키비키잖아!) 멘탈이 장원영님의 반의반도 미치지 못하는 저로서는 도저히 불가능한 영역의 일이네요.

‘올해가 인류에게 있어 가장 시원한 여름이 될 것’이라는 전망을 들어보신 적이 있나요. 지금도 충분히 끔찍한데, 이보다 더워질 일만 남았다니! 인류를 멸망에 이르게 할 존재는 소행성도 핵탄두도 아닌 지구의 온도였던 걸까요.

당장 오늘 출근길에도 여름을 저주하며 여름에 대한 이야기를 끄적여보았습니다. 풀칠러님은 올여름을 어떻게 보내고 있나요? 앞으로 뜨거워지기만 할 미래의 여름을, 우리는 어떻게 준비해야 할까요?

태생적으로 체온이 높은 탓에 남들보다 일찍 여름을 맞이하게 된다. 아마 아빠로부터 물려받은 유전자인 모양이지만, 갱년기도 한참 지난 그를 탓할 나이는 지났다. 여름이니까 당연히 더운 거지. 엄마의 말버릇을 떠올리며 이제는 ‘그러려니'하며 살아보기로 한다.

나만큼 여름을 부지런히 포착하는 건 대중교통이다. 에어컨이 본격적으로 가동되자마자 익명 커뮤니티엔 ‘지하철 냉방 민원’을 주제로 한 글이 부지런히 올라오고 있다. ‘추우니 지하철 온도를 높여라’라는 쪽과 ‘추우면 겉옷을 들고 다녀라’ 양쪽이 첨예하게 대립한다. 충청도 출신(고통마저 유머로 승화해야 한다는 강박이 있음)인 나는 ‘그럴 거면 자차 타고 출근하지 그랬슈’라고 시시덕거리다가, 당장에 나도 차가 없는 처지라는 걸 금방 자각하곤 조용히 입을 다물기로.

지하철 구석자리에 앉아 수십 개의 댓글을 넘겨보았다. 만물의 영장이라며 으스대는 인간도 고작 1-2도 되는 온도차에 사나운 짐승의 소리를 뱉는구나. 이 큰 쇳덩이를 매일 수십 km씩 움직이는 사람들이 실은 이렇게나 유치한 존재들이구나. 더위 때문에 밖으로 나서기도 힘들 지경이라며 싸울 기력은 남아있는 건가. 수신자 없는 물음을 스스로에게 던지다가 이내 지쳐버리고 말았다.

맞은편엔 겉옷을 꺼내 입는 사람과 손풍기를 정수리에 갖다 대는 사람이 나란히 앉아있었다. 과연 모두를 만족시키는 적정 온도란 없는 걸까. 스마트폰 속 사람의 온기가 전혀 느껴지지 않는, 그 날카로운 말들을 보는 동안 전차는 무심히 달렸다.

최근에 본 유튜브에서 우리가 만날 여름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지구가 어떠한 분기점을 넘어섰다고 했는데, 게스트로 출연한 과학자는 그 선을 두고 ‘인류 생존 한계 온도’라 불렀다. 지구는 이제 온난화 단계가 아니라 끓고 있는 상태라고. 큰일 난 건 지구가 아니라 인류라고. 우리는 이제 X됐다고.

인류 최고의 블랙코미디물 <심슨 가족>에서도 기후 위기에 대해 다룬 적이 있다. 바트 심슨이 “올해는 내 인생 최고로 더운 여름이야”라고 말하자, 아빠 호머 심슨은 웃으며 답한다. “올해는 너의 남은 인생에서 가장 시원한 여름이 될 거란다.”

인류가 하루에 만들어내는 탄소가 몇 톤이고 하는 막연한 말보다 이쪽이 훨씬 더 소름 끼친다. 당장 오늘도 끔찍할 정도인데 앞으로 더 뜨거워질 일만 남았다니. ‘인류 생존 한계 온도’라는 말을 새삼 체감하게 된다. 그늘에 땀을 식히며 ‘그래, 이게 여름이지’하는 것도, 보사노바를 들으며 더위를 기꺼이 즐길 수 있는 날도 얼마 남지 않았다. 우리가 기억하는 여름은 곧 사라질 것이다.

몇 년 전부터 친구 마감도비와 대화를 할 때면 우리는 사라진 것들을 되짚는다. 온스테이지, 미야자키 하야오, 언니네이발관, *미각… 왜 좋은 것들은 사라지는가. 아니, 어쩌면 우리가 사라질 만한 것들을 좋아하는 건 아닐까. 사라진 것들과 사라질지도 모를 것들을 이야기하며, 기나긴 한탄을 한다. 구질구질한 종류의 인간인 나는 몇 년째 이미 사라진 것들과 사라질 것만 같은 존재를 곱씹으며 산다. 어쩌면 이게 나의 생존방식일지도 모른다.

*미각: 연신내 최고의 중식집. 지금은 사라지고 없다.

얼마 전에 본 수학강사 정승제님의 예능이 퍽 인상적이었다. 과거 좋아하던 피자(피자헛 치즈크러스트 골드 시즌1)가 단종된 사건 이후, 자신이 마음에 드는 물건을 여럿 구비해 놓는다고 한다. 리모컨 꽂이는 3개, 방석은 8개, 티셔츠는 검정색만 300개, 뭐 이런 식이다.

세상에서 좋아하는 것들이 사라질 것만 같은 거대한 공포. 단종포비아의 원인이 된 피자를 먹어본 적은 없지만, 그 공포감의 크기가 무엇인지를 알고 있다. 내일 당장 고미태의 닭콩국수를 먹을 수 없게 된다면? 내년부터 뉴진스의 새 앨범을 들을 수 없게 된다면? 그런 상상은 도저히 구체화하기조차 싫어질 정도로 끔찍한 일이다.

음악도 영화도 사람도, 시간이 흐르면 사라지기 마련. 여름도 이와 다를 것 없다. 당장 내년 여름은 지금과는 다를 게 분명하다. 지금보다도 더 뜨거운 날들이 더 오래도록 이어질 테니까. 적어도 우리가 아는 여름은 지금뿐이다.

내년 여름이 더 더워질 것이란 전망에 따르면 인간의 단종도 그리 머지않았다. 멸종위기종인 인간이라니. 문득 지하철 빈자리에 앉겠다며 나를 밀친 저 아저씨도, 시끄럽게 통화하는 맞은편 할머니도 미워할 수 없게 된다. 역시 ‘사라진다’라는 형용만으로도 그 존재가 애틋해진다.

나는 이것을 ‘여름적 사고’라 부르기로 했다. 어떤 대상이든 영원할 수 없다는 것. 언젠가 사라진다는 것. 그 사실을 아는 것만으로도 그 대상에 대한 애정을 품을 수밖에 없게 된다. 살면서 내가 누릴 수 있는 가장 시원한 여름은 지금뿐. 올여름의 더위를 마냥 괴로워만 하지는 말자고, 여름이기에 할 수 있는 것들을 마음껏 누리자는 마인드 셋팅이다.

마침 긴 장마가 시작됐다. 가뜩이나 더운 날씨에 습도까지 얹어졌지만, 나쁘지 않다. 비를 핑계 삼아 오랜만에 탁주를 사고 파전을 구웠다. 주말에는 빗소리를 ASMR 삼아 김오키의 음악을 듣고 날씨에 어울리는 영화를 보기로 약속했다. 마치 비가 오기만을 기다린 사람처럼 구는 것 같지만 어쩔 수 없다. 여름적 사고에 의하면 지금이 바로 올여름의 하이라이트니까.

야망백수 : 좋은 것들이 사라져가는 시대를 살면서, 삶을 긍정하는 태도를 유지하는 것이 과연 가능할까요. 세상의 문제를 직면하면서도 슬픔에 젖거나 미치지 않는 것은 또 과연 가능한 얘기일까요.

땀에 흠뻑 젖은 채로, 두통에 시달리며 집으로 돌아가는 지하철 안에서는 종종 이런 생각을 하곤 합니다. '오늘도 내 한 몸을 먹여살리기 위해서 참 많은 것을 외면했는데, 그렇다고 대단히 행복한 것도 아니니 참 수지 타산이 맞지 않다'고요. 이런 생각을 하는 것도 어쩌면 제가 더위에 약한 체질인 탓이겠죠.

그래도 일상을 견뎌내려면 ‘올해가 가장 시원한 여름’이라는 '비극적 농담'에 적당히 웃을 줄도 알아야겠죠. 우리가 예정된 멸종을 두고도 농담 따먹기를 할 수 있는 존재라는 게 참 얄궂네요.

아매오 : 막 졸업하고 취업 준비를 하던 때였습니다. 스타벅스 창가 자리에 앉아 퍼붓듯이 세차게 쏟아지는 장맛비를 보고 있는데 지긋지긋하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당시 저에겐 취업 준비 기간과 장마 기간은 더할 나위 없이 딱 들어 맞는 은유였습니다.

어느 글에서 본 문장. 앞으로 내게는 몇 번의 여름이 남아 있을까? 많아야 5~60번 정도. 그러니 가벼운 옷차림을, 테라스에서 마시는 맥주를, 시원하게 떨어지는 빗방울 소리를 즐겨보자는 내용이었습니다. 5~60번. 생각보다 크지 않은 숫자더라고요.

그로부터 7년 정도가 흘렀습니다. 그동안 나는 여름을 얼마나 즐겼을까? 어떻게 보냈을까? 그때 일기에 썼던 다짐은 단지 다짐으로만 남았나? 오늘 파주 님의 글을 보니 이런 생각이 드네요. 다시 들춰보러 가야겠습니다. 일기는 원래 그런 용도잖아요.

마감도비 : 무척 공감 가는 글이네요. 애정하는 맛집이나 카페가 사라지는 걸 보면서 좋은 것들은 항상 빨리 사라지는구나 하고 아쉬워한 적이 자주 있거든요. 좋아하는 가수가 활동을 접을 때도 비슷한 감정을 느꼈는데, 그땐 제 취향이 마이너해서 그런 건가 하고 자책 아닌 자책을 하기도 했네요.

그런데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유튜브에서 무한도전을 보고, 이만한 프로그램이 더 이상 나오지 않는 것 같다는 댓글을 다는 걸 보면서 향수는 크건 작건 모두가 느끼는 감정이라는 걸 알게 됐습니다. 저도 한때는 왜 좋은 것들이 사라지는지 고민하다가 결국은 있을 때 잘하자는 당연한 쪽으로 생각이 기울게 됐습니다.

사라진 것들, 사라질 것만 같은 것들에 애착을 가지며 살기. 이것도 삶의 한 방식 아닐까요? 애절함은 현재를 더욱 풍부하게 만들어주니까요. 그나저나 창밖으로 쏟아지는 빗소리를 들으며 소중한 우리의 지구는 사라지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풀칠러A

잘 읽었습니다. 딱 이번 주의 저를 보는 것 같아서 술술 읽었네요. 혁신적인걸 해야 한다는데 혁신적인게 뭔지 모르겠고 어쨌든 회의 결과로 뭐가 나오긴 했는데 저게 혁신이 맞나 근데 우리 대표는 나보다 똑똑해서 그런지 그럴 듯한 것 같기도 하고 할 수 있을 거 ㅅ같기도 한데 또 이게 다 무슨 소용이냐 싶기도 하고 헛짓거리 아닌가? 그런 것 같기도 하고 막 그러네요. 혼란합니다다 혼란해~

아매오

혁신의 한복판에서는 그게 혁신인 줄 알아낼 방법이 없죠. 보통은 혼란의 모습을 하고 있고 대부분은 그 모습 그대로 끝납니다. 다만 그것은 정말 긁어보기 전에는 모르는 일이므로, 적어도 그 혁신(인지 혼란인지 모를 혼란)을 수행하고 있는 당사자만큼은 ‘믿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언제나 혼란스러운 이곳…스타트업입니다…(물론 어디든 안 그렇겠냐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