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해변에서
그 해변은 서울에선 일 만 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곳에 있다. 헐벗은 연인들이 비치타월 위에서 노릇노릇 구워지고 소년들은 모래사장 위에서 맨발로 축구를 하는 곳. 모래가 너무 고와서 소년들은 발을 다칠 염려 따윈 하지 않고 있는 힘껏 공을 찬다. 바다 멀리로 공이 날아가면 빛나는 발바닥을 보이며 헤엄을 친다. 주민들은 주말이면 주중에 뜨거워진 머리를 담그러 해변을 찾아오는데, 부지런한 주민들이 파라솔과 비치타월로 백사장을 알록달록 수놓을 때쯤이면 관광객들을 가득 채운 버스가 해안 도로를 지나간다. 옆 동네의 유명한 성을 보러 가는 관광객들은 버스 안에서 해변의 풍경에 감탄하며 사진을 찍는다.
"저 버스를 타고 성을 보러 가려던 게 내 원래 계획이었지" 그가 캐리어에게 말했다.
"호텔에서 쉬는 게 내 계획이었고. 여긴 너무 뜨거워. 결국엔 내 안에 모래가 들어갈 수밖에 없을걸. 그럼 기껏 골라서 챙겨온 옷들을 전부 다시 빨아야 할 거라고." 캐리어가 툴툴댔다.
"나는 계획을 지키는 걸 잘 못하나 봐. 분명히 계획을 세울 당시엔 내가 원했던 걸 텐데도 어느 순간이 되면 그걸 망가뜨리고 싶어져. 이유는 모르겠지만 계획에서 자유로워지는 거야말로 인생이라는 생각이 자꾸만 들어."
그 얘기를 듣고 근처 바위에서 쉬고 있던 갈매기가 푸드덕대며 다가온다.
"자유는 영어로 프리덤. 스페인어로는 리베르따르. 중국어로는 쯔요우. 나는 자유롭고 싶어서 세계를 여행했지. 몸이 움직이는 거리만큼 내 안의 세계도 넓히고 싶어서 외국어를 공부했고. 네 근처에서 어슬렁거려도 될까?"
"물론이지. 넌 정말 열심히 살았겠구나"
"맞아. 그런데 다른 갈매기들이랑 날 비교할 때면 나 스스로가 언제나 아주 게으른 갈매기처럼 느껴져."
"그야 넌 가진 게 없으니까. 자유는 재산이 아니야. 삶을 어느 정도 살고 나면 가방 안에 넣을 수 있는 걸 남겨야지. 그게 없으면 게으른 거야." 캐리어가 끼어들었다. 가방들은 원래 새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그래. 너는 가방이니까. 가방으로 태어나서 가방이 되기 위한 계획을 세울 뿐이지. 우리는 달라. 우리는 움직이는 존재라고. 세상을 둘러보면서 마음속에 무언가 원하는 것을 품지. 이 소망을 며칠을 품고 있으면 계획이 생겨. 계획에 의지가 더해지면 습관이 되고, 한번 습관이 생기면 시간은 무서운 속도로 지나가. 그 시간을 통과하는 동안 우리는 완전히 다른 갈매기가 되어 과거의 소망을 바라봐. 그리곤 깨닫지. 시간이 덧칠된 소망은 더는 소망이 아니라 타성일 뿐이란걸. 그러면 우리는 이 낡고 빛바랜 구조물을 허물어뜨리고 다시 한번 새로운 소망을 품을 준비를 하는 거지. 이 순환을 살아내는 게 자유라고. 가방인 너는 절대로 알 수 없겠지" 게으르다는 말에 기분이 상한 갈매기가 캐리어에게 쏘아붙인다.
"하지만 난 누군가에게 필요한 존재야. 난 방수도 되고 도난 방지용 자물쇠도 달려있지. 내가 움직임을 모른다고? 내겐 360도로 돌아가는 바퀴가 있어. 뒤로도 옆으로도 끌 수 있지. 난 쓸모가 있어. 하지만 너, 자유로운 갈매기는 누구에게 쓸모 있지?"
캐리어가 응수했다. 갈매기의 눈빛이 잠시 흔들리더니 속눈썹 뒤로 후퇴했다. 갈매기는 깃털 속으로 목을 파묻고 동그래졌다.
그는 어색한 분위기 풀고 싶어 갈매기에게 물었다.
"이것 봐 갈매기야. 너는 타성에 대해서 말했지. 내게 타성에 대해서 설명해 줘. 나는 타성에 젖었다는 생각 때문에 여행을 왔어. 타성이 대체 뭐야?"
이미 풀이 죽어버린 갈매기는 한참 생각하다 답한다.
"사실 가방이 맞을지도 몰라. 나는 그냥 나에 대해서 생각하길 멈추지 않는 늙은 갈매기인지도 모르지. 생각을 하기 시작하면 안정감이라고 할 수도 있고, 요즘식으로 루틴이라고 부를 수도 있는 일상에 깃털을 하나 돋아나는데 이 깃털의 이름이 바로 타성이야. 이 깃털이 자라 날개가 되면 용기를 주기도 하지만 날개를 펼쳐 가는 곳엔 불행이 있을 수도 있지. 그런데 타성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무시하는 게 불가능하단 거야. 변해야 할까? 아니면 현실을 계속해서 사랑해야 할까? 타성의 ‘타’에 쓰이는 한자어는 ‘게으를 타’란다. 생각이 너무 많아지면 남들이 보기엔 아주 게으른 놈이 되어버린다는 뜻이지."
"하지만 네가 아까 말한 자유에 대한 얘기는 꽤 멋졌는데."
"그래? 사전 저 아래 어딘가엔 ‘타'라는 글자에 또 다른 뜻도 있다고 적혀있단다. ‘아름다울 타’야. 나는 이걸 믿기로 했어. 우린 이미 날개를 갖고 태어나 버린걸. 이러니저러니 해도 날개는 아름답거든."
그는 충실한 캐리어와 아름다운 갈매기 사이에 드러누워 타성에 대한 두 번째 메모를 썼다.
우리는 쓸모 있고 싶어 하는 동시에 자유롭고 싶어 한다. 그래서 일상을 끊임없이 조직하고 또 허물어트린다. <이대로는 안돼!> 시간을 모두 점유하겠다는 기세로 몰려오는 계획이라는 밀물과 그 모든 노력을 비웃듯 모래성을 휩쓸어 버리는 썰물 같은 타성. 이것들은 전혀 다른 마음 같지만 실은 같은 토양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 조금 전과 지금의 바람이 다르게 느껴지지만 바람의 고향이 결국엔 바다이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