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오늘 풀칠의 글을 맡게 된 다혜라고 합니다.

습관이 인생을 만든다는 말이 있지요. 그렇다면 내 인생을 만든 습관은 무엇일까 돌아보았습니다. 일을 하며 생긴 습관들은 왜인지 영 좋지 않은 것들만 떠오르더라고요. 그 중 하나가 모든 일에 ‘컨펌’을 받아야 마음이 놓이는 습관이었는데요. 그 지점에서 시작하는 이야기입니다.

풀칠러님들은 일하면서 어떤 습관이 생기셨나요? 그 습관은 풀칠러님의 인생을 어떻게 만들고 있나요? 풀칠러님의 개똥철학을 진지하게 묻습니다.

장난감회사 디자인팀에서 수 년을 일하다 퇴사한 내 친구가 비건 베이커리를 오픈하려고 준비하고 있다는 소식을 전했다(두 커리어 사이에 꽤 많은 사건이 있었을 것 같지만 사실 별로 생략된 부분은 없다. 생각보다 세상의 많은 일들이 이런 식으로 흘러간다). 상사들의 기분파 컨펌이 지긋지긋하다며 이제는 좀 덜 벌어도 상관없으니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해 보겠다고 덧붙였다.

친구는 호기롭게 새로운 인생을 시작했다. 디자이너 출신답게 베이커리의 로고디자인을 직접 작업할 예정이라고 했다. 그 의기양양한 기세가 조금 꺾였을 때쯤, 친구인 우리를 호출했다. 내가 만든 이 여러 개의 로고 시안 중 어떤 게 제일 낫냐고 물었다. 아무리 고민해도 본인은 도무지 모르겠으니 제발 너희가 ‘컨펌’해 달라고(우리도 모르겠어 친구야…).

친구가 경험한 몇 년의 고된 회사 생활은 ‘컨펌 증후군’, 그러니까 ‘누군가에게 컨펌받지 않으면 불안한 기분’이라는 (찝찝한) 습관을 남긴 것 같았다. 이렇게 추측할 수 있는 이유는 나 또한 회사 생활을 프리랜서 생활로 전환하며 유사한 심리상태를 경험했기 때문이다. 혼자 모든 것을 꾸려 가는 프리랜서 생활. 내 일에 태클을 거는 사람도 없지만 함께 고민할 사람도 없다. 내 선택이 맞을까? 내 판단이 옳을까? 선택에 대한 결과는 나. 혼. 자. 오롯이 감당해야 한다. 대박도 내 덕, 쪽박도 내 탓이지만 우리 모두 알다시피 인생사에 대박이 그리 쉽던가…

프리랜서의 셀프 컨펌이 어려운 이유는 무엇일까. 곰곰이 고민해 보니 결국 기준이 없어서 그렇다. 모든 선택과 결정에는 기준이 필요하니까. 그럼 회사에서 일할 땐 어떻게 컨펌받았더라? 나는 마케팅팀에서 일했었다. 업계 트렌드, 타겟의 성향, 자사 브랜드와의 조화 등 다방면을 고려한 기준으로 업무를 진행해 상사에게 보고하며 컨펌을 요청했다-고 생각했었는데, 지금 돌아보니 모두 그저 그럴듯한 이야기일 뿐. 결국 상사의 성향과 취향이 가장 큰 기준으로 작용했던 듯하다.

상사가 유능하다는 가정하에 나쁜 기준은 아니었다고 본다. 그 ‘성향과 취향’이라고 뭉뚱그린 말 속에는 그가 여러 해 동안 쌓아온 업무 경험과 거기서 나온 노하우들이 잔뜩 녹아있을 테니. 그걸 기반으로 업무 컨펌을 진행한다면 오히려 훌륭한 기준이라고 할 수도 있지 않은가? 안타깝게도 회사에서 독립한 후에야 그걸 깨달은 내게는 더 이상 유능한 상사가 없었다. 그 경험과 노하우, 이제 내가 갖고 있어야만 한다. 그래야 내 업무를 컨펌하고, 진행해서, 먹고 살 수 있다!

초년생 시절, 나를 못 미더워하던 꼼꼼한 상사는 종종 내 보고에 대해 시험하듯 질문을 던졌다.

“그런데요, 다혜 씨. 이건 ‘이 방법’으로 하면 더 좋지 않나요? 다혜 씨가 말한 ‘그 방법’으로 꼭 해야 하는 이유가 있나요?”

윗사람 말에는 무조건 YES라고 하는 것이 맞다고 생각한 나는 경쾌하게 대답했다.

“아하, 그렇군요! 그럼 ‘그 방법’ 말고 말씀하신 ‘이 방법’으로 바꾸겠습니다!”

그리곤 어차피 지 맘대로 할 거면 왜 시키냐며 뒤에서 궁시렁 거렸다.

돌아보니 참 눈치가 없었다. 상사가 던진 질문의 의도는 스스로의 기준이 뭐냐고 묻는 것이었다. 내 선택에 더 확신을 가지고 논리를 갖춰서 본인을 설득해 보라는 말이었다. 경쾌하고 멍청하게 대답할 때마다 내 업무에 대한 신뢰도 뚝뚝 떨어졌겠지. 에라이. 저 질문들이 결국 내 기준을 세우기 위해 치열하게 고민해야 했을, 업무의 본질이자 가르침의 과정이었던 것도 모르고.

그런 뒤늦은 깨달음 후에도, 여전히 어렵다. 기준을 정한다는 건 많은 내공이 필요한 일이다. 비단 업무 기준뿐일까? 기준을 넘어, 사실 우리 인생에는 항상 정답이 정해져 있지 않았나? 내 경우엔 모의고사 1등급(공부 그냥저냥 함), SKY 대학교(평범한 대학교 감), 대기업(공채는커녕 이직 몇 번 해도 결국 못 감), 내 집 마련(…..ㅠ)…어쩌면 이것은 내 삶의 방식에 대한 지독한 습관이었다. 나는 항상 그 예쁘게 빛나는 정답들을 습관적으로 갈망했다.

그러나 단 한 번도 말끔한 정답을 내 것으로 가지지 못했다. 내 인생은 매번 그 정답들 근처에서 안타깝게 맴돌다 픽 쓰러지기 일쑤였다. 겨우겨우 최소 부분 점수를 받아 미련을 싹 거두기도 힘든 답안지를 가냘프게 쥐고 살았다. 너무 빛나서 모두 원하고 갖고 싶어 하는 그런 답들. 결국 내 것은 절대 되지 못한, 그런 씁쓸한 것들이 내 인생에 미리 정해진 정답이었다. 그 정답의 기준이 뭔지 미처 궁금해할 틈도 없이, 갖지 못한 아쉬움에 허덕이며 종종거리고 살았다.

그러다 퇴사를 하고, 사진을 찍는 일을 시작하고, 아이를 낳았다(이 일들 사이에도 별다른 생략이 없다. 인생은 그냥 이렇게 흘러간다). 이 과정에서 내 인생의 많은 부분이 리셋됐다. 그러다 그렇게 갈망하던 정답도 어느새 잊었다. 아니, 사실 포기했다. 부분 점수가 주던 희망 고문이 별 의미 없다는 걸 받아들였달까. 이미 난 그 정답에서 너무 많이 멀어져 있었다. 그럼 나는 이제 어떤 인생을 살아가야 할까?

뜻밖의 포인트에서 답을 찾았다. 비전공자로서 사진 일을 시작한 나는, 새로운 분야에 발을 들이며 부족한 점이 많았다. 특히 ‘사진의 기준’을 세우는 일이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그래서 다양한 분야의 사진작가와 감독들의 자료를 찾아보기 시작했다. 그러다 보니 내가 찾던 ‘사진의 기준’이 곧 ‘작품 철학’과 맞닿아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런데 그 작품 철학들이 꽤나 제각각이었다. 어떤 철학은 시작부터 결과물까지 (내 기준으로는) 좀 후져 보였고, 어떤 철학은 처음엔 그저 그렇던 결과물도 다시 보고 싶을 만큼 아름다운 마음을 담고 있었다. 그리고 내린 결론. 작품의 유명세가 높다고, 작품 철학의 깊이와 반드시 연결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이 후지든 아름답든 그들은 자기만의 눈으로 세상을 읽고, 새로운 질문을 쓰고, 그에 대한 답을 스스로 만들었다. 세상에 본인의 답을 하도 일관적으로 들이밀다 보니, 사람들이 그 답을 보면 “아, 이거 ㅇㅇㅇ가 만든 거네.”하고 알아볼 정도다. 그 답이 맞고 틀리고는 누구도 판단하지 않는다. 본인만의 질문에 대한 답일 뿐이므로.

나도 그렇게 살아야겠다 마음먹었다. 인생에서 깨달은 어떤 조각들을 잘 모아서, 그것이 비록 누군가에겐 후진 개똥철학일지라도, 나만의 다혜주의(혹은 다혜이즘)에 입각한 삶을 살아야겠다고. 기준도, 질문도, 답도 오직 나에게 있는 그런 삶을 선택하겠다. 다들 옳다는 것이 과연 정말 옳은지, 틀린 것이 진정 틀린지 생각해 보는 삶. 내가 가는 방향이 정확히 어딜 향하고 있는지 스스로 확인하며 노를 젓는 삶. 내 선택을 스스로 ‘컨펌’하는 것에 한치의 두려움도 없는 삶.

비건 베이커리는 몇 년 전의 이야기다. 결국 베이커리는 2년 뒤 폐업했다. 그러나 지금 그 친구는 또 전혀 다른 분야에서 승승장구하고 있다(훈훈한 결말을 위해 그럴듯하게 지어낸 거 같지만, 진짜다!). 한편 나는 다혜주의, 다혜이즘을 완성해 세상에 들이밀기 위해 나만의 개똥철학을 열심히 수집 중인 평온한 삶을 살고 있다. 나 자신에게 흥미로운 질문을 끊임없이 던지고, 그 답을 찾아가는 일로 가득 찬, 끈질기고 즐거운 삶을

글을 읽으면서 완성본을 볼 수 있는 건 세상에 나 하나, 컨펌을 줄 수 있는 것도 나 하나뿐인 이 여정을 '끈질기고 즐겁게' 계속하기 위해선 아무래도 '컨펌하는 나'의 다정함이 관건이겠단 생각을 했습니다. 컨펌은 보통 '허가'로 번역되지만, '내가 뒷배가 되어줄 테니 나 믿고 마음껏 한번 해봐!' 같은 초월번역도 경우에 따라선 가능한 단어니까요.

다혜 님이 오늘 나눠주신 이야기는 스스로에게 건넨 '컨펌 메시지'이기도 하겠죠? 저도 스스로에게 따뜻한 컨펌을 해주는 습관을 들여봐야겠습니다.

오랜만의 저의 이야기를 보내드리는 것 같아요. 저는 박사학위를 받았지만, 결국 제가 연구한 분야와는 무관한 일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다보니 어디가서 제 스스로를 OO분야 전문가라고 말하기도 어렵겠더라고요. 그래도 얻은 건 분명히 있다고 생각해요. 파주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연구든 일이든 하면 할수록 더 잘 모르겠고, 내가 할 수 있는 영역이 정말로 좁다는 것, 그마저도 완전하지 못하다는 것을 비교적 이른 나이에 배울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오늘 하루도 무능한데다가 못난 사람이 되지 않기 위해, 애쓰며 하루를 시작해보려고 합니다. 화이팅!

가혹한 10월을 보내던 중이라 잔뜩 독이 오른 상태로 편지를 쓰고 말았네요. 뒤늦게 반성합니다… 비겁하게 A/S를 해보자면 말입니다. 과신하는 것보단 부족함을 자각하는 상태가 성장하기에 좋은 환경이다란 이야기를 하고 싶었습니다. 당장 지금도 내일 제 시간에 일어나 사무실로 멀쩡히 출근할 수 있을지… 확신이 들지 않네요. 하지만 잘 해내겠죠. 다가올 11월엔 스스로를 적당히 불신하고, 또 적당히 믿어보려고 합니다. 풀칠러님도 화이팅!

오늘 짤방토크랑 풀칠툰 너무 웃기네요 하... "내가 무능한 것도 네 탓" 가슴에 새기겠습니다^^

상사와의 커피챗이 돌연 인생이라는 주제의 딥토크로 넘어가버린 하루를 보냈습니다. 누군가에게는 '라떼'일 상사의 진솔한 인생 이야기가 몹시 재미났습니다. 한 사람의 인생 전체를 좌지우지하는 기조가 지극히 사소한 계기들로 결정되는 과정이 흥미진진하더군요. 요즘 공기가 차가워지면서 그간 지나온 길을 돌아보느라 온갖 감정을 감각하는 가을을 보내는 중이기 때문이었을 겁니다.

아무튼 그 대화 덕분에 사회에서 만났던 '닮고 싶은 선배'의 모양을 되짚어보게 되었는데, 저는 누구의 이야기든 '잘 들을 수 있는' 사람이 가장 멋졌던 것 같습니다. 쌓이고 굳어진 나의 경험 데이터를 과감히 부수고, 새로운 사람의 의견을 흔쾌히 받아들일 수 있는 용단 말이죠. 어쩌면 그것이 나이 먹을수록 가장 하기 힘든 일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술잔 아닌 커피잔을 부딪히며 그런 이야기를 드렸습니다. 당신은 지금까지 만난 상사 중 가장 닮고 싶은 선배라고요. 팀장님 덕분에 일터를 넘어 인간 관계에서도 과거에 매이지 않는 용기, 보다 따뜻하고 명쾌하게 직진할 수 있는 용기를 갖고 산다고 고백하면서요. 나뭇잎이 색색이 물드는 것처럼 이런 저런 색으로 물들어가는 자신의 내면을 바라보는 것이 꽤나 흥미로워, 이 시린 가을이 마냥 시립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진심으로!

예전에는 ‘닮고 싶은 선배’를 만난 것이 큰 행운이라 여겼습니다. 특히 그와 바짝 붙어 일하며 그를 더 깊이 알아갈 수 있는 관계를 맺는 것은 보통 직장인들에겐 매우 드문 상황일 것이라고 생각했죠. 물론 입장을 철회한 건 아닙니다. 다만 이제는 그 시선을 저 자신에게도 좀 나눠주게 되더라고요. 그런 선배를 만난 것은 순수 행운일지 몰라도 그와 함께 일하면서 그러한 감정을 지속할 수 있었던 것은 나 또한 그 기질을 닮기 위해 충분히 애썼기 때문에 가능하지 않았을까 싶어서요.

자뻑하는 재수 없는 인간으로 비칠 수 있는 위험을 감수하는 이유는, “지금까지 만난 상사 중 가장 닮고 싶은 선배”라는 이야기를 그에게 직접 얘기한 풀칠러님 또한 훌륭하실 거라는 말을 하고 싶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그 선배가 풀칠러님이 보신 그 모습으로 존재할 수 있는 것에는 풀칠러님의 기여가 적지 않았을 테니까요. 그런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풀칠러님의 상사 분도, 그런 이야기를 할 줄 아는 풀칠러님도 모두 멋진 직장인이자 멋진 사람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오늘 파주님의 에세이를 보며 '방어적 비관주의'라는 개념이 생각났습니다. 저도 비슷한 타입의 사람인지라 남일 같지 않아서 위안이 되실까 링크를 첨부드립니다. (우리의 불안이는 죄가 없다구요!)

얼마 전 그간 보낸 풀칠 레터를 뒤적여 볼 일이 있었는데요. 유독 제가 보낸 레터나 받은 품앗이가 ‘정신건강’이나 ‘불안’에 대해 다룬 게 많더라고요. 저도 모르는 새에 풀칠레터의 유리멘탈을 담당하고 있던 걸까, 잠시 반성했습니다. 여하튼 보내주신 링크 속 글을 정독했습니다. 이론적으로 알진 못했지만 ‘내가 상상한 최악을 결코 최악이 되진 않는다’라는 저의 망상이 나름 합리적인 접근이었다, 라는 결론을 내릴 수 있었습니다. 품앗이를 보며 곰곰이 생각해봤더니 저의 20대 초반 시절 바이블과도 같았던 책으로부터 이 성향이 기인한 게 아닐까 싶네요. 보내주신 글에 대한 보답으로, 저도 그 책의 문장을 적어 보내드립니다.

‘사람에 대한 기대치가 낮고 삶에 대한 전망이 어두우면 웬만큼 나쁜 일이 닥쳐도 원망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이란 원래 온전히 기댈 수 있는 대상이 아니고, 삶이란 결코 장미와 와인의 나날일 수는 없는 것이라고 평소에 여기고 있기 때문이지요. (중략) 그러고 보면 비관주의자가 꼭 불행한 삶을 사는 것은 아닐지도 모릅니다.불 행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 비관적 전망을 기대하지 않았던 행복이 찾아올 때 좀 더 감사하는 마음을 갖게 해주는 것인지도 모르고요. 그러니까, 당신이 비관적인 성향을 가졌다고 해서 불행으로 가측 찬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기대가 적다면, 오히려 하루하루의 작은 행복들은 더더욱 생생하게 체험될 수도 있으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