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금주의 에세이 당번 파주입니다. 저는 요즘에 죽음에 대해 자주 생각합니다. 죽고 싶다는 이야기는 아니고, 말 그대로 정말 '죽음'이라는 개념에 대해 간간이 고민한다는 겁니다. 시발점이 무엇인지는 정확히 모르겠지만 아마도 죽음과 관련된 소식을 날마다 접하기 때문이지 않을까 추측할 뿐입니다. 최근 집에서 일어난 작은 죽음으로 인해서 저의 일상을 돌아보게 되었는데요. 엉망진창이 되어버린 제 삶을 회복하기 위해서 '일상력*'을 키워야겠다는 결심이 섰습니다. 풀칠러분들의 요즘 일상도 궁금합니다. 힘겨운 하루를 이겨내고 각자의 일상을 잘 지켜내고 있나요? *일상력 : 요즘 MZ세대들은 '일상을 살아낼 수 있는 힘'을 이렇게 부른다고 하더군요. #1 아무래도 존버의 상태가 심상치 않아 보였다. (존버는 내가 키우는 스투키의 이름이다.) 존버의 화분에서 시큼한 냄새가 진하게 풍기길래 길다란 줄기를 살짝 당겨봤더니 '뽕'하는 경쾌한 소리를 내며 뿌리가 통째로 뽑혀버렸다. 그러고 보니 청록색의 영롱한 자태를 뽐내던 스투키가 생기 없는 연두색을 띠기 시작한 것도 벌써 몇달 전 일이다. 그러니까 나는 죽은 식물에 설탕물과 탄산수로 매주 정성 어린 부관참시를 하고 있던 셈이다. 미동도 비명도 없이 명을 다한 존버의 사체를 화장지에 고이 싸서 종량제봉투에 던져 넣었다. 자신의 이름처럼 존나 버티지 못한 채 존버는 떠나버렸다. 식물을 곧잘 시들게 하는 편이라며 구매를 망설이던 나에게 '이 녀석을 죽이기는 쉽지 않을걸요'라던 판촉사원의 도발 섞인 말이 떠올랐다. 햇빛을 많이 쐬지 않아도, 심지어 물을 주는 것을 까먹어도 된다기에 냉큼 구입했던 건데. 이름을 'John Burr'라 지은 것도 다 끈질기다는 생명력 때문이었는데. 그 쉽지 않다는 일을 가뿐히 해낸 스스로가 갑자기 한심하게 느껴졌다. #2 곱게 죽지 못한 존버의 망령이 이 집에 깃든 걸까. 유튜브 알고리즘이 이끈 힙합 아티스트의 영상에서 뜬금없이 나무 이야기가 튀어나왔다. '나무가 죽으면'이라는 말로 시작한 두 사람의 대화는 통렬한 자기반성으로 이어졌다. '집에 있는 나무가 죽은 거야. 잘 안 죽는 건데. 나무가 죽는 걸 보니까 내 생활 패턴이 나무에 대입해서 보이는 거지. 만날 늦게 자고 햇볕 안 보려고 암막커튼을 쳐두고... 아, 내가 잘못되고 있구나.'
'나무가 죽는 건 그만큼 내 생활에 여유가 없다는 거 같아. 내 거실에 놓인 나무 한 번 바라볼 여유가 없는 거야.' 소금과 우원재는 나무의 죽음이 곧 일상이 파괴됐음을 알리는 경고 같은 거라고 했다. 집에서 키우는 나무가 죽었다는 건, 본인이 그만큼 엉망으로 살고 있다는 걸 방증하는 거라고. 나는 존버의 죽음을, 혹은 일상이 망가진 현실을 비겁하게 회피하고 싶었던 걸까. 존버의 생명력을 의심하며 구글링을 해봤지만 스투키 뒤에는 '키우기 쉬운'이나 '생명력 강한', '질긴'이라는 키워드가 뒤따를 뿐이었다. 나 또한 정말 엉망으로 살고 있구나. 내 삶도 정말 실시간으로 개박살이 나고 있구나. 여지없이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3 지난 두 달 정도를 청색과 적색 숫자로 점철된 삶을 살았다. 쉴새없이 오르내리는 일봉 차트를 종일 보느라 눈이 퀭했고, 계좌에 적힌 평가손익에 따라 희망과 절망을 수시로 오갔다. 어느 순간부터 주식과 코인 잔고가 꼭 온라인 맞고게임에서 사용하는 사이버머니처럼 보였다. 더 큰 문제는 주식과 코인에 발을 들인 뒤부터 어느 것에도 쉬이 재미를 붙이지 못한다는 거였다. 호가창을 들여다 보는 것 말고는 어떠한 일도 손에 잡히지 않았다. 물건들이 나름의 질서를 유지하고 있던 방은 어수선해졌고, 부지런히 향유하던 음악과 책은 뒷전이었다. 행여 눈을 감은 사이에 손실이 날까 전전긍긍하며 제대로 잠도 이루지도 못했다. 몸과 정신을 갈아넣은 것의 대가로 바라던 만큼의 수익을 얻었지만 행복감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비릿한 향이 풍겼다. 존버의 죽음을 발견했을 때 맡았던 죽음의 냄새, 삶이 엉망이라는 걸 알리는 냄새였다. 존버가 머물던 자리로 눈길이 향했다. 그 자리에는 아직 세 개의 화분이 더 남아있었다. 돈나무인 '도니'와 행운목 '로토토(로또 1등을 기원하며 이름이다)', 정체불명(식물종을 알 수 없어 멋대로 이름 지은)의 '청시'가 그것이다. 스투키까지 박살난 척박한 이곳에서 목숨을 부지하고 있는 이들이 대견하면서 한편으로 불안감이 엄습했다. 저것들마저 죽어버리면, 내 삶이 정말로 엉망진창이라는 걸 다시 한번 인정해야 할 것만 같았다. 존버의 잔해를 처리한 날, 스마트폰 메인에 있던 증권과 코인거래소 어플을 삭제했다. 오르내리는 양봉과 음봉이 나의 정신과 건강과 시간을 모조리 앗아가는 게 두려웠다. 존버가 무관심 속에 생을 마감했듯이,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 일상을 서서히 죽여가고 있는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통장에 요행으로 얻은 몇 푼을 채워 넣는 것보다는 엉망이 된 일상을 회복하는 게 급선무였다. #4
일상을 회복하겠다는 거창한 목표를 세웠지만, 실천은 소소하기 그지없는 일들로 가득했다. 이를테면 좋아하는 향의 핸드워시와 섬유유연제를 구입하거나 최선을 다해 머그컵과 티코스터를 고르는 일. 선호하는 향의 원두를 고르고 친환경 세제나 물티슈를 장바구니에 담아두는 일. 내 공간에 좋아하는 소리를 채우고, 읽을 책들을 나름의 순서대로 정렬하는 일들. 햇볕이 방안으로 쏟아지는 시간에 침대에 누워 멍하니 빛을 감상하는 일. 이런 시시하고 조잡한 행동들이 나를 행복하게 만든다는 걸 알게 됐다. 작년부터 미뤄온 아침 루틴을 만드는 일에도 착수했다. 잠자리를 정리하고 창문을 열어 환기하거나 유산균과 물을 챙겨 먹는 것. 움직이는 족족 뿌드득 소리를 내는 관절을 눌러 풀어주는 등 별것도 아닌 일들을 성실하게 해냈다. 잃어버린 정신과 몸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건강한 일상을 유지해야 한다는 걸 이제는 잘 알기 때문이다. 존버의 죽음 이후 나에게 일상을 살아가는 동력, 요즘 것들 말로 일상력이라고 말하는 그 힘이 알게 모르게 커져가는 것만큼은 분명했다. 존버가 떠난 자리에 새로운 스투키를 들여놓았다. 존버가 아닌 것을 존버라 부를 수 없으니, 이름 옆에 Jr.을 적어두었다. 그러니까 신입 스투키의 이름은 존버 주니어다. 모쪼록 이번에는 이름처럼 존나게 버틸 수 있기를. 존버 주니어도, 나도. 아침형 인간인 제겐 주말 오전을 보내는 태도가 일상력의 바로미터입니다. 전 날 밤 잔뜩 술에 취해 쓰러져 잠든 게 아니라면 오전을 꽤 열심히 즐기는 편이거든요. 열어둔 창문으로 들려오는 일상 소음을 배경음악 삼아 따뜻한 커피를 천천히 마시면서 책을 읽거나 글을 씁니다. 근데 일상력이 빨피다? 오전은커녕 하루 종일 자다 깨다를 반복합니다(그 와중에 일찍 일어나긴 함). 유튜브 좀 보다가 자고, 아점 먹고 자고, 책 좀 읽다가 자고, 글 좀 쓰다가 자고, 영화 좀 보다가 자고, 인스타나 뒤적이다가 또 자고. 그러다 보면 어느새 잘 시간이라서 씻고 잡니다. 날도 풀리는데... 일상력 좀 회복하고 싶군요. 저도 이름 모를 식물친구를 룸메이트로 두고 있는데요, 엄청 쪼마난 크리스마스트리같이 생긴 나무에요. 몇 달 전에 선물 받은 다음 옥탑방 발코니에 내놓고 죽었는지 살았는지 신경도 안 쓰고 있었는데 john Burr의 부고를 듣고 생각나서 한번 내다봤습니다. 놀라우리만큼 무탈하게 잘 자라고 있더군요. 제가 지난 몇 달간 그 흔한 루틴 하나 만들지 못해 무기력과 버닝을 오가며 부정적 에너지를 뿜뿜하며 개판으로 지냈음에도 불구하고요. 식물친구가 저를 위해서 사는 게 아닌 줄은 물론 알지만, 누가 보든 안 보든 자기 삶이 놓인 자리에서 잘 살아가는 그 모습이 퍽 감동적이더군요. 이런 게 ‘일상력’의 순기능인가 봐요. 내 일상을 잘 꾸리다 보면 언젠가 그 모습만으로도 남에게 힘이 되는 순간이 생긴다는 거요. 파주님의 안온한 일상을 응원합니다. ‘일상력’ 만랩 찍고 저 쩔 좀 해주세요. 저도 집에 시들어버린 화분이 하나 있습니다. 짙은 녹색의 뭉툭한 잎이 반질반질 윤이 나던 녀석이었는데. 정신을 차려보니 어느새 새카맣게 말라비틀어져 있더라고요. 재택근무를 하며 밥을 챙겨 먹는 둥 마는 둥 마감에 쫓겨 잠도 줄이던 시기였습니다. 원예에 소질이 없다고 핑계를 대기에는 그간 지쳐버린 제 몸과 마음이 화분에 겹쳐 보였습니다. 그래서 존버의 죽음을 깨달았을 때 파주님이 느꼈을 기분을 어렴풋하게나마 알 것 같습니다. 저는 아직 새로운 화분을 들일 엄두는 내지 못했지만 일상을 회복하겠다는 파주님의 결심과 행동을 본받고 싶네요. 바쁜 와중에도 스스로의 일상을 더욱 챙겨야겠다는 다짐을 하고 갑니다. 저도, 파주님도, 존버 주니어도 파이팅입니다. 오늘 저희가 보내드린 이야기들, 어떠셨나요? 저희는 여러분의 이야기도 궁금해요. 일하면서 겪은 일, 늘상 끌어안고 있는 고민, 오늘 편지에 대한 피드백, 무엇이든 좋답니다. 아래 버튼을 눌러 여러분의 풀칠하는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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