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무채색의 어두운 옷을 주로 입었다. (무심코 ’즐겨’라고 썼다가 바꿨다. 엄연히 말해 즐긴 건 아니라서;;) 피부가 까만 편이라 옷이 조금만 밝아도 본래 모습보다 더 도드라지는 것 같아 약간 낯부끄러웠다. 물론 빨가벗고 다니는 게 아닌 이상 옷 때문에 나를 주목할 사람은 없을 테다. 그치만 집을 나서기 전에 마주치는 전신거울 속 내가 빤히 보고 있으니까.

여름을 대비해 쇼핑을 했다.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 여름은 참 웃기는 계절이다. 기본적으로 매우 덥지만 정작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는 대중교통이나 사무실 안은 오히려 춥기 때문이다. 아무리 예쁜 반팔과 반바지를 사 입어도 춥다는 이유로 셔츠나 가디건, 담요 등으로 덮어 가린다. 어이없어. 실외에서 벗고 실내에서 입는 여름용 외투를 팔면 어떨까?

쇼핑 얘기로 돌아와서. 이번엔 평소와 다른 옷들을 샀다. 핑크색 양말, 독특한 드로잉이 디테일로 들어간 신발, 초록색 반바지, 주황색 티셔츠, 파스텔톤의 다양한 색이 세로로 뒤섞인 반팔 셔츠. 하나 같이 밝다. 패셔니스타가 되는 길은 막힌 지 오래지만, 포인트 하나 주는 정도로 시도해보고 싶어졌다. 남들은 클래식으로 옮겨가는 삼십대에 이제서야…

점심으로 짬뽕을 먹으며 회사 동료들에게 물었다.

“저 새로 셔츠 샀는데 어때요?”

“예쁘네요.”

“귀엽지 않나요?”

“귀엽네요.”

‘귀엽다'는 ‘예쁘다'보다 레어한 느낌을 주는 표현이다. 옷에 대해선 ‘예쁘다'의 용례가 매우 넓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멋지다'보다는 덜 부담스럽다. ‘멋지다'는 뭔가 본격적이라서 좀 그래. 어쨌든 말하지 않으면 아무도 모를 작은 변화를 은근하게 알리고 싶었다. 그래서일까? 양치를 하다 셔츠에 튄 짬뽕 국물을 발견하곤 마음이 약간 쓰렸다.

그래도 출근할 때 옷 고르는 재미가 생겼다. 나만 아는 재미고 나만 아는 변화지만 아무렴 어때. 자연스레 스티브 잡스와 마크 주커버그가 떠오른다. 똑같은 옷만 입는 것으로 유명한 사람들. (그럼 짱구도?) 그들은 옷을 쇼핑하고 고르는 데 필요한 시간과 에너지를 아끼는 것은 물론 그 자체로 일종의 브랜딩 효과까지 누렸다. #출근룩을 검색하면 피드를 따라 무한대로 전시되는 각양각색의 코디들이 무색하다. 역시 무엇이든 성공하고 봐야 하는 건가? 성공한 자의 모든 것은 성공의 조건으로 입에 오르내리니 말이다.

2.

흔히 3대 소비생활로 의‧식‧주를 꼽곤 한다. 근데 그게 바뀌었다고 한다. 한국소비자원에서 발표하는 한국의 소비생활지표에 따르면 2019년에 3대 소비생활에서 ‘의'가 빠지고 ‘금융'이 들어왔으며, 2021년에는 다시 들어온 ‘의' 대신에 ‘주'가 빠졌다. 참고로 금융은 2019년에는 3위, 2021년에는 2위다. 그 성장세로 미뤄보건대 의식주의 천하삼분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을 듯하다. 핵 전쟁이 나서 모든 금융 시스템이 마비되고 복구 불가능 상태에 빠지는 경우가 아니라면 말이다. 의식주가 아니라니… 지금은 60억 지구가 아닌 70억 지구라는 얘기를 들었을 때만큼 충격적이었다. (심지어 현재 세계 인구는 79억 5천 만으로 곧 80억을 돌파할 예정이다.)

그런 점에서 내 새로운 관심사가 재테크가 아닌 패션이라는 점은 다소 의아한 부분이 있다. 온 세상이 돈을 벌고, 모으고, 불리는 이야기를 하는데 뜬금없이 패션이라니. 심지어 십 대나 이십 대가 아닌, 현실적으로도 재테크가 필요한 삼십 대가 된 바로 이 시점에 말이다. 뚝심 있게 나만의 무언가를 찾기보다는 시류에 기꺼이 휩쓸리며 찍먹하는 것을 선호하는 나로서는 더더욱 이런 상황이 의외다. 돈 안 되는 것에만 관심 갖는 성향이 메인 스탯에 가까워 그런 것인지 추측해 볼 따름이다. 아니면 돈 되는 것을 좇으려면 꼭 갖춰야 할 경쟁심이나 치열함이 부족한 것일 수도.

돈 안 되는 것을 메인으로 좇아도 먹고 사는 데 문제가 없을 만큼만 벌고 모으고 불리면 되지 않을까? 잡스나 주커버그가 옷 고르는 데 들어갈 시간과 에너지를 아껴 돈을 벌었던 것과 반대로 나는 돈을 버는 데 쓸 시간과 에너지를 아껴 책을 읽고 글을 쓰고 옷을 입을 것이다. 물론 그들이라고 다른 건 다 제쳐두고 돈만 벌었던 것도 아니다. (그들은 창조적 혁신가다!) 설사 그렇다고 하더라도 시간X에너지당 성과 총량을 비교하면 민망하기 그지 없이 차이가 날 테다. 그렇지만 일단 도식이 대충 그렇게 다른 걸로 이해하자.

3.

작게 피어난 관심을 적극적으로 실천에 옮기는 것의 일환으로 과감하게 컬러 플레이를 해오던 중 얼마 전에는 회사의 상징색과 똑같은 색의 티셔츠를 입고 출근하고 말았다. 당연히 의도한 것은 아니다. 그걸 인지하고 있었다면 굳이... 아마 들었다가도 내려놨을 것이다. 놀림감이 될 걸 알면서도 후진하지 않고 그 결과를 굳고 의연하게 마주할 수 있는 사람은 아니니까. 사무실에 도착해 자리에 앉자마자 놀림 당했다. 동료들은 “그런 애사심은 어떻게 하면 가질 수 있는 거예요? 깔깔깔!” 하고 웃었다.

애사심과 주인 의식을 갖고 열심히 일하는 사람들을 진심으로 존경한다. 이렇게 말하는 게 조금 조심스럽지만, 그들은 회사를 너무 사랑하는 바람에 회사를 박차고 나가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아니면 박차고 나가도 될까 고민을 하고 있든지. 일종의 허무함이랄까. 대개 ‘내 것’에 대한 갈망이 있는 듯하다. 당연히 경력과 경험이 남고 회사에서 충분히 인정해주겠지만, 그리고 실제로 ‘내 것'을 시작하는 데 그러한 것들이 매우 든든한 기반이 되어주겠지만, 쏟은 만큼 남지 않았다는 느낌을 받을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나는… ‘이렇게 할 거면 내 걸 하는 게 낫겠다’라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다. 그렇다고 영혼 없이 출퇴근 하는 것도 아니다. 나름대로 재미를 느끼고 의욕도 가진 채 매일 아침 집을 나선다. 대충 집에서 뒹굴거리던 복장으로 나가지 않는 것도 그러한 마음가짐을 조금은 반영한 결과다. 어쩌면 애정의 대상이 회사가 아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보낸 만큼 돌아오지 않는 애정이 딱히 섭섭하지 않다. 그러니 내 애정의 대상은 차라리 ‘일'인 것이다. 내 일, 그리고 회사의 일. 어쨌거나 놀림 받기는 싫으므로 이 티셔츠는 휴일에만 입어야겠다고 속으로 다짐했다.

동료들의 옷을 구경하는 게 재밌다. 퇴근 뒤 약속 유무가 한눈에 드러나는 이가 있는 반면, 늘 꾸민 듯 꾸미지 않은 듯 평균치를 유지하는 사람도 있다. 저 분은 저 옷을 사고, 고르고, 입을 때 무슨 생각을 했을까? 아무 생각도 안 했을까? 며칠 전에 머리 색을 바꾸셨던데 그럼 자주 입는 옷도 바뀔까? 자기도 모르게 회사 상징색을 골랐다가 내려놓은 적 있을까? 옷을 핑계 삼아 동료를 궁금해 한다. 무언가 ‘힘준' 느낌이 나는 분에게는 꼭 옷 얘기를 한다. ‘멋지네요’ 또는 ‘귀엽네요’라고. 맞다. 최소한 옷은 좋은 스몰토크 소재이기도 한 것이다. 아~! 내일은 뭐 입지?

파주

지난 주말에는 바라보기만 해도 기분이 좋아지는 멋진 구름이 하늘 곳곳에 펼쳐져 있었잖아요! 그날 고개를 들어 구름을 보느라고 산책만 세 시간을 하고 말았어요 히히… 저는 요즘 걸어다니며 보이는 모든 것들을 정성들여 눈에 담는 행위가 얼마나 아름다운 일인지 조금씩 알아가고 있습니다. 지금 내리는 비가 그치면 다시 근사한 하늘이 나타나겠죠? 풀칠러님이 늘 그래오셨듯 주변을 둘러보시면서 자주자주 행복감을 느끼시기를, 진심으로 바라겠습니다!

풀칠러B

아매오

어떤 작가는 하루의 행복한 순간 1초를 영상으로 남겨 이어 붙이는 작업을 수년 간 해오고 있다고 합니다. 1년치 행복이 약 6분에 담기는 것이지요. 뭐야? 어렵지도 않을 것 같은데 대단해 보이잖아? 그런데 바로 그런 것들이 진짜로 실행하기 어려운 것들이란 걸 우린 너무 잘 압니다. 아니... '우린'이라고 하면 안 되겠군요. 풀칠러 님은 충분히 잘 해내고 계시는잖아요? 하핫.

풀칠러C

마감도비

마감이 고민이시군요. 잘 찾아오셨습니다. 마감의 바위를 굴리는 시지프스들에게 하루 오 분의 즐거움만큼 좋은 방파제는 없죠. 오 분의 행복감으로 나머지 하루의 절반, 아니 깨어있는 시간 전부의 괴로움을 버틸 수 있다니. 우리 모두는 엄청난 ‘가성비’를 구가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네요. 오늘은 와인 두 잔 드시길. 오늘 하루도 고생하셨습니다.

풀칠러D

파주

풀칠러님이 보내주신 품앗이를 보니 해방클럽 멤버 박상민 부장의 대사가 떠오르네요.

“어딜 가나 속 터지는 인간들은 있을 거고, 그 인간들은 절대로 변하지 않을 거고. 그럼 내가 바뀌어야 되는데, 나의 이 분노를 놓고 싶지 않아. 나의 분노는 너무 정당해. 너무나도 정당한 이 분노를 매번 꾹 눌러야 하는 게 고역이야.”

저 또한 마찬가지인데요. 제 경우에는 정당한 분노를 누르기보다는 다른 것으로 희석시키는 방법을 택했습니다. 단골카페에서 누리는 자유시간, 좋아하는 가수의 플레이리스트, 향긋한 섬유유연제를 잔뜩 넣고 빨래하기 등등… 행복이 보장된 행동들을 마구마구 하면서요.

참, 저의 보장된 행복 중 하나는 풀칠러님들이 보내주시는 품앗이를 엑셀파일이 닳을 정도로 반복해서 읽는 건데요. 저에게 보장된 행복을 선물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풀칠러님! 자주자주 행복하세요😄

풀칠러E

야망백수

풀칠러F

마감도비

저는 뒤늦게 해방일지에 동참했습니다. 한 주를 기다릴 필요는 없지만 행복한 마음으로 에피소드를 아껴서 보고 있죠. 풀칠러님에게 저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 중 하나로군요 호호. 오늘 하루도 고생 많으셨습니다. 우리 모두 늘 맑고 구김 없이, 행복하기로 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