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도 일 좋아하시죠?[풀칠 96호]

2022. 6. 29.

안녕하세요 풀칠러님. 이번 주 풀칠 마감 당번 야망백수입니다. 비가 시원하게 내리는 밤입니다. 내일은 종일 빗소리나 들으면서 누워있고 싶네요.

풀칠 96호의 주제는 ‘프로페셔널'입니다. 월급을 받고 있긴 하니까 저도 물론 ‘프로’겠지만, 누군가에게 ‘역시 프로네요~’같은 말이라도 듣게 되면 영 머쓱해집니다. 프로라는 단어가 풍기는 탁월함을 감당하기엔 역부족이란 걸 잘 알고 있기 때문이겠죠. 언제쯤 ‘프로'라는 말 앞에서 당당해질까요?

에고. 비는 쏟아지고 몸은 천근만근이지만 출근해야겠죠? 그게 프로다운 거겠죠?

아침에 핸드폰을 보다 이제는 잘 연락하지 않은, 사귄 지 오래된 친구의 생일이란 걸 알게 됐다. 케이크 모양 그래픽이 눈에 밟힌다. 하지만 출근이 급하므로 무시한다.

에디터라는 직무가 풍기는 뉘앙스 덕분으로, 동료들 사이에서 나는 일종의 '글 프로'로 대우받는다. 그러나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니다. 나는 내가 회사에서 쓰는 글들이 좀 부끄럽다. 애를 많이 쓰긴 했지만, 완성까지 주어진 시간이 너무 짧다. 좋은 문장과 나쁜 문장을 저울질할 시간도 퇴고를 위해 초고를 잠시 묵혀둘 시간도 없다. ‘내 글’이라고 주장할 수 있는 지도 솔직히 잘 모르겠다. 어쩌면 에디터란 글을 잘 쓰는 사람이라는 통념과는 달리 글을 잘 내다 버릴 수 있는 사람인지도 모르겠다. 내가 수행하는 기능은 글이라기보단 마감이다.

같이 점심을 먹은 동료는 내게 잘 읽었다는 말을 건넨다. 나는 그 잘 읽었다는 말 때문에 그가 정말로 읽은 것인지, 조금은 의심스럽다. "원래 글을 좋아하세요?" 그가 물어왔다. 그는 디자이너다. 나는 대답하기가 애매해서 그냥 질문을 돌려준다. "디자인... 좋아하세요?" 그가 웃었다. 나도 웃었다. 아무래도 누군가에게 그의 일을 좋아하냐고 물어볼 때는 앞에 '그래도..'라는 쿠션어를 쓰는 게 좋겠다. 어느 유명한 영화의 명대사처럼. 그래도 디자인 좋아하시죠?

회사의 개발자들과 얘기할 때마다 나는 글쓰기가 코딩과 비슷할 것 같다는 상상을 하곤 한다. 글쓰기도 모르고 개발도 잘 모르지만 그냥 그런 생각이 든다. 어쩌면 개발자들이란 대게 눈이 퀭하고, 커피를 많이 마시며, 오랜 시간 자판을 타닥거리는 이들이라는 스테레오타입 때문에 이런 생각을 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는 실제로 그런 모습으로 자주 마주친다. 늦은 시간에. 화장실에서. 공통점은 또 있다. 우리가 하는 일 뒤엔 '짠다'라는 말이 잘 어울린다. 코드를 짠다. 논리를 짠다. 눈물을 짠다. 그래도 개발 좋아하시죠?

내가 겨우겨우 쥐어짜낸 텍스트를 업로드하는 페이지는, 디자이너와 개발자가 힘을 합쳐 지은 공간이다. 나는 거기에 입주해서 이 기능 저 기능 건드리며 불평을 쏟아내는 까다로운 세입자다. 오늘도 작은 불편함을 찾아내서 제보를 했다. 아무래도 버그 같다고. 개발자는 버그가 아니라 반은 의도된 것이며, 반은 기술적 한계라고 얘기했다. 그런가 보다 했다. 퇴근 직전에 개발자에게 DM이 왔다. “ 다시 생각해 보니 버그가 맞습니다. 부족한 실력으로 오판해서 죄송합니다. 알려주셔서 고맙습니다” DM에 감정 표현을 누른다. 하트. 때마침 비가 내리기 시작했기에 우산모양 그래픽도 찾아서 누른다. 창밖으로 비 구경을 하며 나도 누군가에게 사과를 해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을 한다. 사과를 하고 싶다. 누구에게? 조회 수와 트래픽들에게. 개발자가 내게 그랬듯이 DM을 보내 사과하고 싶다.

비는 오후 내내 내린다. 퇴근시간은 지났지만 사람들은 집에 가지 않는다. 대신 비가 잦아들길 기다리며 배달음식을 시킨다. 비가 점점 많이 내린다. 집까지 가는 길이 온통 물로 가득 찼다. 이러다간 지하철 역사가 거대한 수영장이 될지도 모르겠다. 나는 미숙한 수영선수다. 아직 어떤 영법도 배우지 못했지만 때가 되어 레일에 뛰어든. 온 힘을 쥐어짜 딛고 있던 땅을 밀쳐낸 반작용으로만 나아가며 아직 한 번의 숨도 내쉬지 못한. 잠영의 속력도 내겐 제법 빠르게 느껴진다. 동력이 언제까지 유지될지 나는 모른다. 계속 갈 수 있을지 나는 모른다. 물속을 움직여 집으로 돌아간다.

집에 돌아왔는데도 여전히 친구의 생일이다. 아침의 일이 아주 먼 옛날 같다. 친구의 이름 옆 케이크 모양 그래픽이 아니었으면 길을 잃을 뻔했다. 대화창을 켜두고 친구와 내가 자주 왕래하던 시절을 생각한다. 친구는 노래를 만든다. 1년인가 1년 반인가 거쳐 기어코 노래를 한 곡 발표했다. 1년에 하나라니, 친구는 마감이 아니라 노래를 좇는다. 세상엔 마감이 필요한 곳도 있고 노래가 필요한 곳도 있어서 우리는 둘 다 어찌어찌 살아가고는 있지만, 둘 사이의 거리가 이렇게나 멀 일인가. 그 간극은 무엇으로 메워야 하나. 기프티콘으로? 기프티콘을 고르며 친구가 즐겨 부르던 노래를 생각해낸다. ‘흔하고도 어여쁜 우리는 모두 조각배라오*’

빗소리에 노랫소리가 섞여든다. 필생의 역작을 깎느라 흘린 땀이든 퇴근길에 남몰래 떨군 눈물이든 물이긴 매한가지다. 한 데 모일 움푹한 곳만 있다면 무리 없이 섞여들 다 똑같은 물. 천만의 조각배가 정박한 도시, 늘 목마른 가문 빌딩들 위로 비가 세차게 내린다.

*에세이 제목과 노랫말은 손지연님의 노래, <조각배>에서 빌려왔습니다.

아매오 : 요즘 회사에서 자주 하는 고민은 ‘감당할 수 있는 업무량'과 ‘충분히 빠른 업무 속도' 사이의 역학관계입니다. “두 가지는 공존할 수 있을까요?”라는 질문을 뚫어져라 쳐다보다가 저도 모르게 얘기하고 말았습니다. “있을까요?”라고 물어선 안 된다고. 사실 그것들은 공존할 때만 유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서로가 서로의 바텀라인이 되어줘야 하죠. 감당할 수 있는 업무량에 집착하느라 업무 속도를 놓치면 어떤 성과도 낼 수 없고요, 충분히 빠른 업무 속도를 맞추기 위해 업무량을 과도하게 늘리면 개인이 망가질 테니까요.

둘 사이의 적정선을 찾아가는 과정이 곧 성장이고 성장을 멈추지 않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이야말로 프로가 아닐까 합니다. 그리고 다른 동료가 그러더라고요. 소화할 수 있는 업무량은 우상향하기 마련이라고. 그 말을 들으니 단박에 이해되더라고요. 아! 강제된 것이 아닌 자발적 동기부여에 의해 시간을 갈아 넣어 업무량과 업무속도의 총합을 밀어 올리는 사람은 성장이 빠를 수밖에 없구나, 하고 말이죠. 때에 따라선 그런 것도 정말 필요하다고 느낍니다. 어차피 평생 일해야 한다면, 시니컬한 태도는 이제 좀 버리려고요. 어느 작가의 말마따나, 평일도 인생이니까.

파주 : 저 또한 에디터로 밥벌이를 하고 있는데요. 얼마 전 이 회사에 지원한다는 후배가 ‘에디터가 뭐하는 직무냐?’고 물어왔는데 선뜻 답하질 못했어요. 솔직히, 저도 에디터가 무슨 일을 하는지 아직은 잘 모르겠거든요. 어떤 날은 카피를 쓰고 또 어떤 날은 촬영기획을 하고… 또 어떤 날은 카메라를 직접 들기도 하니까요.

이전 직장에서 에디터로 일을 할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하는 일은 주로 문장을 뜯어고치는 일이었지만, 기획과 섭외는 물론 출간 이후 홍보 방안까지 고민해야 하는 게 에디터의 일이었으니까요. 그야말로 책을 쓰는 것 외에 모든 일을 도맡아 하는 게 에디터의 업무였습니다. 어쩌면 말이죠. ‘이것도 내가 할 일인가?’ 싶으면 보통 내 일이 되는 게 에디터라는 직무의 숙명일지도요.

마감도비 : 생각이 많아지는 글이네요. 저도 가끔 비슷한 생각을 해요. 나는 프로인가? 하고 말이죠. 프로라는 게 자기 일을 좋아하면서 잘하는, 그래서 어떤 성과를 이룬 멋진 사람을 지칭하는 것처럼 생각될 때가 있어요. 그런 점에서 저는 프로가 아닌 거 같아요. 그런가 하면, 그냥 자기 일로 밥벌이 할 수 있으면 그게 프로 아냐? 하는 반발심이 들기도 해요. 그런 점에서 저는 프로가 맞는 거 같아요.

혹은, ‘일을 대하는 태도’를 기준으로 프로냐 아니냐를 나눌 수도 있겠죠. 그렇게 본다면 저에게 야망백수님은 프로인 거 같아요. 스스로 쓴 것처럼 야망백수님이 ‘글을 잘 내다 버릴 수 있는 사람’일지도 모르지만 그건 글이 못마땅하다고 해서 끌어안고만 있을 수는 없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죠. 누군가는 그 글을 넘겨받아야 하니까요. 그런 염려야말로 프로의 조건이 아닌가 해요. 되어야 하는 일은 되어야 하니까요.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라는 영화를 참 좋아합니다. 어쩌면 우리에겐 하늘이 내려준 딱 맞는 내 일 같은 건 없다는 걸 깨닫는 동시에 지금 이 순간 내가 하고 있는 이게 바로 내 일이구나 나직이 되뇌는 순간이 오는 걸지도 모르죠. 그 때 우리는 프로가 되어가는 게 아닐까요. 요즘 같은 날씨에 어울리는 글 잘 읽었습니다. 덕분에 눅진해진 마음 말리고 갑니다.

BY.야망백수

▲ 프로의 기준

“커리어에 대한 야망은 0.1%도 없다. 난 산에 들어가 피아노만 치고 싶은 사람이다. 단지 그렇게 되면 수입이 없기에 피아노를 치는 것"

미국 반 클라이번 국제 콩쿠르에서 역대 최연소로 우승한 임윤찬님의 인터뷰 내용입니다. 젊은 천재가 되기엔 조금 늦었지만, 우리 모두 산에 들어가서 살고 싶은 이유 하나쯤은 가슴 속에 품고 있잖아요? 꾹 참고 속세에서 풀칠하고 있는 우리 모두가 프로입니다.

풀칠러A

취미를 둘 데가 없다는 야망백수님의 만화 한 컷이 제 심금을 울렸습니다…

야망백수

모든 취미 공통의 준비물은 여유가 아닐까요. 몸 둘 공간도 마음 둘 공간도 넉넉한 하루 보내시길 바라요 🙂

풀칠러B

연차가 쌓일수록 취미는 짬이 나는 시간에 하는 게 아닌, '시간을 내서 직장인인 내가 열심히 번 돈을 써가며 배우는 사치스러운 것' 으로 변해가는 것 같아요.아마 2년 전 코로나 이후로 운동과 공연 보기의 취미를 잃은 사람이 많을 것 같은데요.. 저도 운동이라는 취미를 어쩔 수 없이 놓았었지만, 그래도 예전의 나를 기억하면 생기가 도는 기분이 들어요! 저는 직장에서의 저의 삶이 제 부캐라고 생각하곤 합니다(물론 하루의 대부분을 부캐로 보내지만..) 본캐는 퇴근 후 혹은 주말에 하고싶은 걸 하며 쉬는 멋지고 여유로운 저지요 후후.. 라고 생각하면 삶이 재미있어지실 거라고 생각을 해봅니다ㅎㅎ솔직히 취미가 없으면 어떤가요 그게 뭐라고~ 가끔 우리는 취미를 즐길 시간도 돈도 주지 않는 주제에 취미가 뭐냐고 묻는 것에 과하게 집착하는 것 같아요적성에 맞는 즐거워하는 일을 하고 있고, 주변의 인정을 받는 마감도비님의 삶은 제 시선에는 진심으로 너무 멋있어요! 사진 너무 느낌 좋네요. 덥고 습한 요즘이지만 늘 행복하시길 바랍니다 :)

마감도비

맞아요. 취미라는 게 때로는 추억으로 남아있어서 지금 당장 즐기진 못하더라도 그 기억만으로도 행복한 때가 있더라구요. 우리에게 정말 필요한 건 취미 그 자체보다도 지금 자신이 시간을 어떻게 쓸지 결정할 수 있는 상황이겠죠. 코시국도 조금씩 막바지를 향해가니 상황은 더 나아지겠죠? 사진이 마음에 드셨다니 다행이네요. 저도 풀칠러님의 행복한 하루 기원하겠습니다!

풀칠러C

이번 풀칠도 너무 잘, 공감하며, 슬프게, 씁쓸하게, 곱씹이며 읽었네요. 고맙습니다. 워킹맘으로 재택근무를 내내 하면서 너무 지루한 일상을 보내고 있어요. 올해는 다꾸를 해보고 싶었고 스티커를 열심히 사모았는데 결론적으로 다이어리에 쓸게 없네요? 하하하하.... 취미가 있었는데 없습니다... 같은 느낌입니다 :)

파주

풀칠러님의 취미를 ‘다꾸를 위한 준비’ 혹은 ‘스티커 모으기’로 바꾼다면 취미 만들기에 대성공하신 게 아닐까요...?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풀칠러D

핑크양말 너무 귀여워요 ㅎㅎㅎ

아매오

과감한 컬러플레이로 옷차림에 대한 (좋든 나쁘든) 코멘트를 자주 듣는 요즘입니다. (좋든 나쁘든) 관심은 아매오를 옷 입게 합니다. 호호.

풀칠러E

스트레스는 현대인들의 불치병이네요. "현대 의학으로 널 도울 방법은 없다"라니... 어디에 기대면 좋은걸까요? T.T

파주

저도 한 달 넘게 구내염을 앓고 있는데요. 참 기묘한 게 스트레스가 적은 날은 ‘사라졌나’ 싶다가도, 일이 안 풀리는 날이면 버섯이 자라는 것마냥 실시간으로 커지는 게 느껴지더라고요. 일종의 ‘스트레스 측정기’처럼 말이죠… 내일 알보칠 바를 생각을 하니 말이 길었네요. 스트레스로부터의 해방을 아는 풀칠러분이 있다면 꼭 길을 일러주시길, 간곡히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