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헨티나가 월드컵 우승을 차지했다. 조별리그 첫 경기에서 사우디아라비아에 당한 충격적인 역전패는 결과적으로 리오넬 메시의 라스트 댄스에 서사를 부여하는 장치가 됐다. ‘메시의 월드컵 우승’은 모든 아르헨티나 선수들의 간절한 목표이기도 했다. 대부분의 간절함이 그렇듯 그것은 무거운 부담감과 강력한 동기부여라는 동전의 양면을 갖고 있었다. 조별리그에서 선수들의 표정에 드러나는 감정은 부담감이었다. 조급함은 역전패로 이어졌다. 그때 그들은 완전히 ‘잃을 게 많은’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16강, 8강, 4강을 거쳐 마침내 결승 무대를 밟을 때 그들은 매우 동기부여 돼 있는 것처럼 보였다.
메시의 대관식을 망치려 든 최대 빌런은 그의 소속팀 PSG 동료이자 프랑스 공격수 킬리안 음바페로 드러났다. 결승전에서 무려 세 골을 넣었다. 66년 잉글랜드 월드컵 이후 처음 나온 기록이라고 한다. 그 덕분에 메시는 마지막까지, 아니, 오히려 마지막에 더 험난한 길을 걸었다. 잠깐, 이건 너무 메시 쪽에 치우친 스토리텔링이다. 음바페와 프랑스도 못지 않게 동기부여 돼 있었다. 벤제마, 캉테, 포그바 같은 주축 선수들이 빠진 상황에서 프랑스는 디펜딩 챔피언의 저주를 깨고 2연속 우승이라는 위업을 달성할 기회를 맞았다. 명실상부 프랑스 에이스이자 메시 이후의 시대를 상징하는 음바페의 마음가짐도 남달랐을 것이다.
잠깐, 이건 너무 결승전에 치우친 스토리텔링이다. 손흥민과 대한민국도 못지 않게 동기부여 돼 있었다. 네이마르와 브라질도 그렇다. 해리케인과 잉글랜드는 또 어떻고. 개최국인 카타르는 말할 것도 없다. 이번 월드컵에 임한 32개팀과 수백 명의 선수, 감독, 코칭 스태프들에게도 저마다의 간절함이 있었을 것이다. 아무리 아르헨티나라고 해도 겨우 한 경기 승리에 국경일을 선포한 사우디아라비아, 희박한 경우의 수를 뚫고 기적적으로 16강에 진출해 환희에 들뜬 대한민국, 8강을 비교적 해낼 만한 일로 여겼을 브라질… 각기 다른 목적을 갖고 대회에 임한 이들은 각기 다른 표정을 한 채 퇴장했다.
월드컵에서까지 무언가를 배워야 하는가? 당연히 그럴 필요는 없다. 우리가 뭐 배움의 민족도 아니고. 치킨만 제때 배달되면 그걸로 행복할 테다. 게다가 애초에 월드컵을 시청하지 않은 사람들도 있었을 터. 하지만 스포츠로부터 뭔가를 배운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아사다 마오의 선전에 모두가 긴장한 그때 썩소를 짓던 김연아를 보며, ‘할 수 있다’라며 스스로를 다독이던 박상영을 보며, 안면 마스크를 쓰고도 기어코 캡틴의 역할을 해낸 손흥민을 보며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셨는지. 그것은 보고 외우는 게 아니라 말 그대로 보고 느끼는 것이다. 그리고 이번 월드컵에서 내가 느낀 점은 이것이다. (중꺾마) 우리는 모두 각자의 게임을 한다는 것.
밥벌이 하는 우리도 그렇다. 모두 다 각자의 게임을 한다. 일은 일이고 삶은 삶인 누군가가 있는 반면, 일과 삶을 일치시키고자 노력하는 누군가가 있다. 연봉을 올리고 싶은 누군가가 있는 반면, 관심 있는 산업과 직무를 바탕으로 커리어를 개발해 나가고 싶은 누군가가 있다. 가치를 달성하기 위해 성과를 내려는 누군가가 있는 반면, 성과를 내기 위해 적절한 가치를 설정하는 누군가가 있다. 회사에 소속돼 차근차근 단계를 밟아나가고 싶은 누군가가 있는 반면, 무엇이 됐든 내 것을 하고 싶은 누군가가 있다. 이 중 누군가가 될지 선택할 수 있는 권한이 누구에게나 있다. 각자의 상황에 맞춰 선택하고 책임지는 주변 사람들을 우리는 잘 안다.
퇴사한 다음에야 비로소 (전) 동료들에 대한 친밀감을 느끼곤 했던 기묘한 경험도 이러한 맥락에서 비롯된 결과가 아닐까 싶었다. 선택의 갈림길에서 서로 다른 쪽을 향해 한 발 내딛은 순간, 잠시나마 그들과 함께였다는 것이 기적과도 같은 일이었다는 사실을 깨달아 버렸다. 나만큼이나 치열하게 자기만의 게임을 전개해 나가고 있었다는 이들에게 뒤늦게 동질감이 들었다. 하지만 늦었다고 생각했을 때는 진짜 늦었다고 명수옹이 그랬지. 다행히도 이제는 그 사실을, 그래도 몇 번 해봤다고, 너무나도 잘 안다. 그래서인지, 좀 우습게 보일지 모르겠지만, 이번 회사에서는 (현) 동료들과도 꽤 가깝게 지낸다. 선도 긋지 않고 벽도 쌓지 않고.
여기서 중요한 사실. 단 한 명의 개인이 일생에 걸쳐 이 모든 선택을 할 수도 있다. 한 사람에게 오직 한 가지의 선택만 주어지지는 않는다. 현재의 나와 1년 후의 나와 3년 후의 나, 5년 후의 나, 10년 후의 나는 모두 이어져 있지만 사실상 다른 사람이라고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각 시기의 선택은 그 앞 시기에 내린 선택에 의한 결과인 듯 보이지만, 실은 그 시기에 최선인 선택만 있을 뿐이다. 다소 말장난처럼 들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직접 처해보면 안다. 실제로 누구나 한 번 쯤은 그러한 상황에 놓여 봤을 테다. 그때와는 상황이 달라졌고 지금은 완전히 다른 선택을 해야 하는 상황. 사실 내가 그렇다. 여태 그래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