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년회에 다녀왔다. 올해 알게 된 사람들과, 올해 만들어낸 성과들을 축하하는 자리였다. 이런 자리는 마치 전투 후의 연회 같다. 올 한 해도 실패자가 되진 않았다는 만족감을 서로의 호주머니에 쑤셔 넣어주는 그런 자리. 자리가 끝날 때쯤이면 꼭 서로가 서로의 전리품처럼 느껴진다.
이런 자리는 늘 왠지 모를 불편한 감정, 과식했을 때 느껴지는 거북함과 비슷한 감정들을 남긴다. 올 한 해도 고생하셨습니다 수고 많으셨습니다 목청 높여 외치며 모든 게 다 괜찮다는 듯이 굴면서 한 해의 마지막 일주일을 보내버려도 정말 괜찮은걸까. 한 해의 얻은 것들을 기념하는 자리가 있다면 잃어버린 것들을 위한 자리도 마땅히 있어야 한다. 올 한 해 잃어버린 것들을 불러 모아 송년회를 열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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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것들의 송년회에 제일 먼저 찾아온 녀석은 에어팟 프로다. 30만 원이 넘는 하얗고 미끈한 조약돌 같은 기계. 올 8월에 부산으로 여름휴가를 떠났다가, 대로변에 하얗고 멀끔한 판매점이 보이길래 불쑥 들어가서 충동적으로 구매했다. 결코 싸지 않은 이 기계를, 여행지에서 흔히 파는 싸구려 열쇠고리 사듯이 사버렸다는 사실에 나는 적잖이 놀랐었다.
에어팟 : 그때 넌 분명히 화가 나 있었어. 그래서 날 산 거지.
맞다, 아마도 나는 화가 나있었던 것 같다. 사실은 휴가를 떠난 것도 화가 나서였다. 그런데 누가 나를 화나게 했냐고 묻는다면 도통할 말이 없다. 나는 애초에 남들에게 화를 쏟아내서 CX 팀의 골치를 아프게 만드는 그런 부류의 사람이 아니다. 외려 온 힘을 다해서 화를 내더라도 아무도-바로 옆자리에 있는 동료조차-알아차리지 못하는, 그래서 화를 내는 보람이 없어서 화를 내지 않는 그런 사람에 더 가깝다. 그런데 이 영특한 흰 조약돌 같은 에어팟은 나의 화를 알아봐 줬다. 내가 화났다는 걸 알아봐 주는 게 반가워 물었다.
나 : 그래, 내가 뭐 때문에 화가 났는지도 알겠니?
에어팟 : 아마도 내가 비싸서겠지. 나를 두고 비싸다고 불평하는 사람들에게 내가 늘 해왔던 얘기가 있어.
나 : 뭔데?
에어팟 : "저는 당신이 갖고 싶어 하는 ‘비싼 것들’ 중에서, 당신이 살 수 있는 몇 안 되는, 어쩌면 유일한 물건이랍니다. 그러니 따지고 보면 싼 편인 거죠."
에어팟의 말은 사실이었다. 집이나 차나 뭐 그런 내가 갖고 싶어 하는 다른 비싼 것들은 살 엄두도 나지 않았다. 집은커녕, 좀 살만한 방을 빌리기도 겁이 난다. 여름 내내 나는 더 넓은 방과 깨끗한 욕실을 갈망해왔다. 이렇게 매일 밤늦게까지, 근로기준법이 정한 노동시간을 당연하단듯이 초과해가며 일하는데도 왜 나는 건조대를 펼쳐둘 공간도 없는 방에서 지내야 하는가. 심지어 적지 않은 돈을 방세로 내면서?
나는 깨끗한 방이 필요해서 더 많은 돈을 원했다. 이전까지 물질적인 가치에 큰 욕심이 없는 것을 스스로의 장점으로 여겨오면 살았던지라 더 많은 돈을 골몰하는 사람이 돼버린 것은 내 자존심에 상처를 남겼다. 무엇보다도 괴로운 것은, 내가 처한 이 상황을 어디에도 탓할 곳이 없다는 거다. 엄마한테 얘길한다면 괜히 미안해하기나 할 것이고, 어디 인터넷 커뮤니티에다가 한풀이라도 할라치면 열심히 살지 않은 죄라고 욕이나 먹을 게 뻔하고, 친구들한테 말하면 어디 지원 사업이나 알아보라며 똑똑한 체들을 할 것이다.
결국엔 내 탓이다. 정부의 이런저런 지원 사업을 끈덕지게 알아볼 만큼 영민하지 못한 내 탓. 그러나 나는 끈질기게 대출을 알아본다던가 살만한 집을 구할 때까지 부동산을 돈다던가 하는 삶을 능숙하게 다루는 재주는 없지만 호쾌하게 카드를 긁어대는 재주는 있다. 할부는 어떻게 하시겠어요. 일시불로 해주세요. 에어팟은 아마 어느 새벽의 퇴근길에 주머니에서 빠져버렸을 것이다. 나는 구태여 찾지 않았다. 얄미운 에어팟. 그럼에도 구매 가능한 에어팟. 에어팟의 등을 한 번 두드리며 송년회에 와줘서 고맙다고 말했다. 에어팟에게 노래 선곡을 맡겼다. 에어팟이 노래를 트는 동안, 송년회의 두 번째 손님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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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손님은 덩치가 꽤 크다. 일 년 전쯤에 사서 애지중지 다루던 전자 키보드다. 봄에 서울로 이사 올 땐 행여나 고장 날까 걱정돼 이불로 이중 삼중으로 둘둘 말아서 트럭의 가장 안쪽에 모셔두고도 서울로 오는 내내 마음을 졸였었는데, 올가을엔 그냥 내다 버렸다. 회사를 다니니 영 칠 시간도 안 나는 데다가 공간도 여간 많이 차지하는 게 아니었기 때문이다.
중고 거래로 팔아치울 생각도 안 해본 건 아니지만 얼마 되지도 않는 퇴근 후의 시간에 사진을 찍어 올리고 또 남과 약속을 잡고 시간을 맞춰서 나가야 한다고 생각하니 영 피로해져서 관뒀다. 대신 나는 이 미끈한 물건을 그냥 집 앞에 유기해버렸다. 커다란 전자제품을 버리려면 어디엔가 무슨 신고 같은 걸 해야 한다고 들었지만, 자세히 알아보기도 귀찮고 이미 소중한 것을 내다 버리기로 결심하기까지 했는데 무슨 힘을 더 쏟아야 하나 싶어서, 출근길에 들고 나와 집 앞에 슬쩍 내려뒀다. 밤에 돌아와보니 키보드는 없어져있었다.
키보드 : 그래, 날 내다 버리니까 좀 살만해졌니?
나 : 글쎄. 더 나빠지진 않았지.
키보드 : 너는 결국 날 다루는 법을 배우지 못할 거야.
나 : 글쎄. 그걸 바랬는지도 몰라.
키보드를 산 이유는 어디에선가 그랜드 피아노를 갖고 싶어 하는 늙은 약사의 이야기를 읽었기 때문이다. 늙은 약사는 평생 동안 자기가 피아노를 칠 줄 아는 사람이 되길 바라왔다. 어느 날, 약사의 오랜 소망을 알고 있었던 친구들이 돈을 모아 그랜드 피아노를 약사에게 선물해 줬다. 약사는 마침내 그랜드 피아노 앞에 섰다. 조심스레 건반을 하나 눌렀다. 띵. 방 안에 울려 퍼지는 건반 소리를 듣는 바로 그 순간, 약사는 자기가 이미 이 악기를 다루는 법을 배우기엔 너무 늦었음을, 자기 손으론 어떤 선율도 짜낼 수 없으리란 걸 깨달았다.
작년, 피아노를 샀을 무렵, 이 이야기는 내가 아는 한 가장 무서운 이야기였다. 하지만 이제는 다르다. 오히려 약사가 부러울 지경이다. 약사는 아마도 처음이자 마지막 피아노 연주를 마치고 평온을 얻었을 것이므로. 더 이상 가능성에 번민할 필요가 없다는 건 해석에 따라 축복도 될 수 있다. 까짓 피아노 좀 칠 줄 모르면 뭐 어떤가. 그는 이미 약사인데! 하고 싶은 걸 모두 하고 살아야만 충만한 삶인 건 아니다. 내 삶은 이미 일로 꽉 차 있다.
게다가 키보드를 내다 버린 덕분에 빨래 건조대를 양쪽 다 펼쳐놓을 수 있게 됐다. 빨래를 건조하는 생산성이 두 배가 된 것이다. 양 날개를 활짝 펼치고 서 있는 새 모양의 이 철골 구조물은 악기 대신 방의 한가운데에 놓일만한 자격이 충분히 있다. 빨래 건조대가 없다면 나는 일주일도 버티지 못할 것이다. 아마 악취를 풍기며 변명을 늘어놓게 되겠지. 나를 사람 구실하게 만들어주는데 핵심적인 역할을 하는 것은 키보드가 아니라 건조대다.
나 : 너보단 건조대가 더 소중해
키보드 : 괜찮아. 다들 그렇더라고. 내가 있는 곳엔 건조대 때문에 쫓겨난 기타, 드럼, 가정용 러닝머신, 실내용 자전거, 철봉이 넘쳐나.
에어팟과 키보드는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둘 다 취했나 보다. 슬슬 피곤해지려던 찰나 새로운 손님이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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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송년회에 찾아온 세 번째 손님을 보고선 깜짝 놀라고 말았다. 그는 바로 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동시에 내가 아니기도 했다. 지금의 나와 미묘하게 달랐다. 얼굴은 조금 더 갸름하고, 눈은 아주 조금 더 크고, 몸은 조금 더 홀쭉했다. 그는 성큼성큼 방으로 들어왔다. 피아노를 번쩍 들어 침대 위로 옮기고, 건조대를 조금도 망설임 없이 접어서 구석으로 치워버린 다음, 에어팟을 주머니에 챙기고, 내 맞은편에 앉았다.
조금 홀쭉한 나 : 잘 지냈어?
나 : 그럴 리가.
한때 나였던 모습이, 지금 내가 바라는 모습이라는 걸 마주하고 나니 도저히 잘 지냈다는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조금 홀쭉한 나 : 뭐가 문젠데?
나 : 아무것도, 혹은 모든 것이.
잃어버린 것들과 송년회를 하기 전, 노란 조명을 밝혀둔 어두컴컴한 바에서 지중해식 식사에 와인을 곁들인 송년회를 할 땐 아무 문제도 없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지금, 잃어버린 것들과 송년회를 하고 있는 방에선 모든 게 문제처럼 느껴진다. 아주 가까운 과거의 나에 비해 지금 나는 왜 이렇게 의기소침해졌나. 왜 더 이상 책을 읽으며 기뻐하지 않나. 왜 아침에 새로 하고 싶은 일들을 떠올리며 깨어나지 않나. 왜 기만적인 마케팅을 바라보며 냉소를 흘리는 대신 부끄러움을 느껴야 하나. 과거의 나는 연봉이나 사대보험이나 신용카드 같은 것들과 관계를 맺지 않는 대신 세상의 후짐에 대해서 떳떳할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당차게 분노하는 대신 살살 눈치를 보며 외면한다. 이따금씩 이게 정말 제대로 사는 건가, 내가 정말 원한 삶인가라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그럴 때마다 이것도 다 내 선택의 일부라고 마음을 다독인다. 나는 누가 등을 떠밀어서 이렇게 사는 게 아니다. 좋아 보이는 선택을 했을 뿐이고, 그 선택에 따라붙는 라이프스타일의 디테일들, 그러니까 연봉을 받는 대신 감수해야 하는 것들에 대해선 미처 자세히 알지 못했을 뿐이다.
조금 홀쭉한 나 : 그래, 돈을 좀 버니깐 어때?
나 : 좋아. 너는 네가 자유롭고, 용기 있다고 생각하지. 인생을 원하는 대로 꾸려나가고 있다고. 그런데 아니야. 너는 그냥 곡예를 했을 뿐이야. 사람들이 너를 좀 봐줬으면 하며. 물론 몇몇은 널 쳐다봤지. 하지만 그건 줄 위에 위태롭게 서 있는 네가 걱정이 돼서야. 그리고 넌 어차피 널 바라보는 사람들을 눈여겨보지도 않았잖아. 네가 의식하던 건 그냥 너였지.
조금 홀쭉한 나 : 맞아. 그래도 스스로를 꽤 괜찮은 사람이라고 믿으면서 사는 건 즐거운 일이야.
과거의 나는 키보드를 치기 시작했다. 연주에 맞춰 에어팟은 춤을 춘다. 그는 급기야 인스타 라이브까지 켰다. 그 모습을 바라보다 나는 문득 외로워졌다. 사람들과 모이는 자리에서 불쑥 외로워질 때마다 늘 하던 대로 나는 살짝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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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가운 공기에 코끝이 아리다. 코를 훌쩍이며 애인에게 전화를 건다. 애인과 나는 먼 곳에 있어서 자주 만나진 못하지만 전화만큼은 부지런히 나눈다.
나 : 송년회 마치고 들어가는 길이야.
애인도 나처럼 지친 목소리로 하루를 읊어준다. 우리는 같은 회사 사람도 아니면서 서로의 노고를 알아주기 바쁘다. 애인은 아마 한 해 동안 내가 어떤 마음으로 일했는지를 아는 유일한 사람일 것이다. 어떤 요청이 나를 밤을 새우게 만들었는지, 어떤 프로젝트가 들인 노력에 비해 성과가 저조해서 나를 의기소침하게 만들었는지 애인은 속속들이 알고 있다.
나 : 새해엔 더 나아지겠지?
나아진다는 게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알지도 못하지만 우리는 이 물음을 자주 나눴다. 이것은 둘 사이에서 통용되는 일종의 놀이다. 둘 중 하나가 나아지겠지 하고 물으면 상대는 최대한 무심하게, 별 당연한 소리를 다 한다는 듯이, 그러나 다정하게 ‘그럼’ 하고 대답하는 것이 규칙이다. 그 나아진다는 것이 연봉이 오른다는 건지, 더 좋은 집으로 이사를 가게 된다는 건지, 살이 빠진다는 건지, 야근을 좀 덜하게 된다는 건지 알 수 없지만 원래 희망은 디테일엔 깃들지 않는 법이니 상관없다.
전화기를 귀에 꼭 대고 다시 방으로 돌아간다. 잃어버린 것들은 그 사이에 다들 떠났나 보다. 방이 텅 비어있다. 전화를 스피커폰 모드로 돌려놓고, 모두가 떠나간 자리에 눕는다. 우리는 얘기를 계속한다. 핸드폰을 서로의 육신처럼 머리맡에 두고 얘기를 나누기도 하고 각자의 소일거리를 하기도 한다. 잃어버린 것들을 불러 모아 송년회까지 치렀는데도 내겐 여전히 남아있는 게 있다. 자꾸만 뭔가를 잃어버리게 되는 세상이지만 이런 순간들이 있다면 괜한 배짱을 부리고 싶어진다. 아무리 잃고 또 잃어도 나는 완전히 무너지진 않을 것이다, 이런 믿음을 갖고 새해를 향해 한번 올 테면 와 보란 듯이 손을 휘적거려본다.
나 : 새해엔 더 나아지겠지?
애인 : 그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