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이번 주 풀칠 마감 당번 아매오입니다. 한 주간 잘 지내셨나요?

저는 요새 포트폴리오를 만들고 있습니다. 그동안의 커리어를 돌아볼 겸 본격적으로 구직을 해야겠다는 마음이 생겼거든요. 사실 좀 쫓기는 듯한 기분이 들기도 했고요.

그래도 포트폴리오를 만들다 보니 조급함이 많이 가라앉았습니다. 좀 더 장기적으로, 넓게, 차분하게 스스로를 바라보는 과정 자체가 심신 안정에 큰 도움이 되더군요.

여러분은 포트폴리오를 만들어 보셨나요? 어떤 식으로 만드셨나요? 어떻게 활용하셨나요?

책 읽고 인생이 바뀌어 큰 부를 쌓았다는 사람들이 왜 이렇게 많은지 모르겠다. 내가 책을 읽어 바뀐 것이라곤 진로밖에 없다. 친구 따라 이과 가겠다는 훌륭한 생각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고1 여름방학 때 책 한 권 읽고 장래희망이 생기는 바람에 문과에 갔다(장래희망을 이루는 데는 실패했다). 쌓인 거라곤 쓰잘데기 없는 상식이나 잡생각뿐이다. 그러니 책만 읽어도 성공할 수 있다는 말에 의문이 생길 수밖에(책은 장 지글러의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였고 장래희망은 기자였다. 겨우 이런 책과 장래희망이라 인생도 안 바뀌고 큰 부도 쌓지 못한 걸까?).

책 읽고 인생이 바뀌어 큰 부를 쌓았다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대략 다음의 논리를 따른다. 성공한 사람이라면 응당 책을 쓴다. 그가 현재의 성공에 이르기까지 겪었던 크고 작은 시행착오와 그로부터 얻은 통찰이 거기에 담겼다. 그것들을 익혀 내 인생에 적용하면 그 사람 만큼은 아니더라도 일정 수준의 성공을 거머쥐는 데 걸리는 시간을 획기적으로 줄일 수 있다. 위대한 투자자 중 한 명인 레이 달리오가 수십 년 간 다양한 경험을 쌓으며 다져온 삶의 ‘원칙’을 고작 700쪽 좀 넘는 책을 통해 흡수할 수 있다니. 얼마나 뛰어난 가성비인가! 혜자 중의 혜자다.

근데 그게 말이 되나? 좀 의심스럽다. 성공한 사람의 책은 그냥 성공 이야기라는 점에서 일단 그렇다. 물론 그도 언젠가 실패를 겪었을 것이다. 하지만 당시의 그에게만 해당하는 실패다. 이미 성공한 다음에 푸는 썰이라는 점에서 그건 이미 실패 이야기가 아니다. 모든 이야기는 결국 현재의 성공으로 이어질 거란 사실을 책을 쓴 작가도 알고 책을 읽는 나도 안다. 책을 편집한 편집자도 알고 책을 파는 마케터도 안다. 토스 이야기를 담은 책 『유난한 도전』에는 실패담이 적지 않게 나온다. 그런데 토스가 실패했나? 이 책이 나온 현 시점에 토스는 아주 크게 성공한 회사다.

물론 에피소드별로 배울 점은 분명 있다. ‘실패’의 경험을 ‘어떻게’ 지나왔는지, ‘성공’의 기회를 ‘어떻게’ 잡았는지 살피고 거기서 뽑아낸 일반적인 원칙을 내 방식대로 잘 숙성시켜 적용해 나가면 나를 좀 더 발전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다. 그게 자기계발의 본래 목적이기도 하다. 어떤 사람은 자기계발서를 읽는 이유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따지고 보면 하나마나 한 소리지만 원래 하나마나 한 소리에 성공의 법칙이 있다. 그걸 반복적으로 읽으며 되새기다 보면 조금이라도 행동으로 옮기지 않을까” 자기계발서를 읽는 이유를 설명한 것 중에서 가장 설득력 있었다.

하지만 책 읽고 인생이 바뀌어 큰 부를 쌓았다는 사람들은 어떤 책의 어느 부분을 읽었고 무엇을 배웠으며 그것을 삶의 어떤 부분에 어떻게 반영했는지 서술하지 않는다. 모르긴 몰라도 그렇게 말할 줄 아는 사람이라면 몇 시간을 일하고 얼마를 번다며 숫자를 말하기보다는 자기 언어로 풀어낸 메시지를 전할 것이다. 그 메시지를 적용한 경험을 말할 것이다. 숫자는 이야기의 근거로서 설득력을 높일 뿐이다. 레이 달리오의 『원칙』은 그런 책이다. 『유난한 도전』이 재밌었던 것도 그것이 토스의 성공을 자랑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들의 이야기를 구체적으로 전했기 때문이다.

나는 책 읽고 인생이 바뀌어 큰 부를 쌓았다며 책을 내는 사람이 되고 싶지 않다. 전자책은 더더욱.

그런데 요즘 그런 사람이 된 듯해 불쾌하다. 인생이 바뀌지도 않았고 큰 부를 쌓지도 않았으며 책을 쓰고 있는 것도 아니다. 유튜브도 안 한다. 그렇다면 왜? 포트폴리오 때문이다. 얼마 전 전문성을 주제로 한 에세이 코멘트에도 썼지만 나는 복붙해서 이직할 수 있는 회사가 없는 일을 했다. 여러 직무의 일부 업무를 수행해왔는데 바로 그 이유로 다른 어떤 직무로도 직행이 어렵다. ‘전에 했던 업무의 성과’와 ‘해당 업무에 기여한 정도’와 ‘내가 그 직무에 적합한 이유’를 엮어 어필하기 어려웠다. 무엇으로 지원을 하더라도 어딘가 억지를 부리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포트폴리오는 ‘현재의 나’를 ‘성공한 사람’으로 전제한다. 장단점이 고루 있고 실패도 종종 했지만 결과적으로 난 꽤 괜찮은 사람이라는 점을 어필해야 한다. 심지어 그 직무에 나보다 잘 맞는 사람은 없을 거라고 설득해야 한다. 프로젝트의 규모와 기간을 쓰고 AS-IS와 TO-BE를 구체적인 수치를 활용해 쓰고 내 역할은 무엇이었는지 (대개는 부풀려서) 쓴다. 이때는 이야기가 아니라 몇 줄의 카피와 숫자로 간결하되 명확하게 써야 한다. 그러다 보니 포트폴리오엔 생략되는 것들이 많다. 생략되는 것들 중엔 염치도 있다. 그래서 포트폴리오를 제출하고 나면 늘 부끄럽다.

다만 포트폴리오에서 생략되는 것들은 적어도 내 안에는 남는다. 그래서 그것을 만드는 과정만큼은 충분히 유의미하다. 포트폴리오를 만드는 과정은 글에 제목을 붙이는 과정과 비슷하다. 서울대 김영민 교수는 칼럼집 『공부란 무엇인가』에서 “제목을 붙이는 과정에서, 학생은 자신이 쓴 글의 내용에 대해 한 번 더 생각해볼 수 있다. 그리고 제목 붙이기는 전체와 부분의 관계, 그리고 ‘대표’ 혹은 ‘재현’이라는 개념에 대해 생각해볼 좋은 기회를 제공한다”라며 “제목은 내용을 잘 반영하되, 함축적이어야 하고, 함축적이면서 눈길을 끌 수 있어야 한다.”라고 덧붙였다.

커리어의 한때에 제목을 붙인다는 마음으로 포트폴리오를 만든다. 그때마다 나의 지금까지의 삶을 돌아보고 그 삶을 이루는 경험들을 좀 더 숙성시킬 기회를 얻는다. 제출할 때마다 부끄럽겠지만 전보다 내 경험을 더 깊이 있게 해석할 줄 알게 되고 그럼으로써 더 성숙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만큼 다음에 제출할 포트폴리오는 좀 덜 느끼해질 것이라고 믿는다. 그러다가도 내 생각보다 덜 느끼하게 받아들인 곳이 있다면 한번 만나보자고 연락 주시겠지. 김영민 교수의 같은 글 속 다른 문장을 소개하며 마무리 해보려고 한다.

“자신의 독특한 경험에 맞는 섬세한 언어로 자신의 경험을 포착하지 않는 한 그 경험은 사라지고 그만큼 자신의 삶도 망실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