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하철에서 노트북을 두드리는 사람을 만난다면 용서해 주세요 [풀칠 174호]

2024. 2. 21.

안녕하세요 풀칠러님. 이번 주의 에세이 당번 마감도비입니다. 오늘은 비상에 대한 세 번째 이야기로 찾아왔습니다.

이번 주 풀칠에서는 마감이라는 비상사태를 마주하는 직장인의 삶의 단면을 기록해보았는데요. 비상사태란 역시 설명하는 게 아니라 살아내는 것인가 봅니다. 굳이 마감이 아니더라도 어려운 상황 속에서 맡은 일을 끝마쳐야 하는 건 직장인의 숙명이 아닌가 해요. 여러분은 끝낼 수 없을 것만 같던 일을 끝낸, 그런 경험이 있으신가요?

풀칠 주제가 ‘비상’으로 정해진 뒤 무슨 얘기를 써볼까 나름 머리를 굴렸던 나를 반성한다. 사실 모든 비상사태가 그렇듯 닥치기 전까지는 모두가 여유로우며 저 나름의 계획을 가지고 있기 마련이다. 더욱이 비상사태는 당해봐야 그 의미를 알 수 있는 주제였던 것이다. 마감도비에게 가장 어울리는 비상은 비상(非想, 상념을 끊고 득도의 경지에 들어감.)도 비상(飛翔, 공중을 날아다님.)도 아닌 비상(非常, 큰일 남.)이었던 것이다. 도가도 비상도는 개뿔. 제길 마감이 두 시간도 안 남았다. 진짜 비상이다!

매일 지면 마감을 해야 한다는 일의 특성 탓이기도 하겠지만 비상사태에 자주 부닥치는 편이다. 특히 마감시간이 다가올수록 더욱 그렇다. 여유로운 마감은 없고 마감 전 컨디션은 늘 좋지 않다. 아침에는 전날 마신 술로 속이 안 좋고, 낮에는 사람을 만나 얘기를 하고 행사에 참석해 어려운 단어를 주워듣느라 모든 기운이 소진된 상태에서 노트북 화면 앞에 앉아야 하니 말이다. 머리는 지끈거리고 눈앞은 캄캄하다. 커피도 아무 소용이 없다.

때로는 마감이라는 녀석이 체할 듯이 백주 대낮에 찾아올 때도 있다. 아니 오후 일정은 이미 정해져 있고 점심엔 미팅을 하기로 했는데 지금 마감을 하라고? 이게 무슨 개떡 같은 지시인가 싶지만 아 맞다! 나 마감도비지, 하며 노트북을 펼친다. 지하철에서 노트북을 펼쳐야 하는 불상사가 벌어지는 것도 그 때문이다.

사실 지하철에서 노트북을 펼치는 건 이제 익숙한 일이 되었다. 좁은 좌석에 앉아 자판을 두드리고 있는 동안 분명 옆 사람들에게 민폐일 거라는 게 유일한 걸림돌이다. 더구나 한 겨울에는 두꺼운 롱패딩을 입고 있는 탓에 사실상 옆구리를 찌르는 것과 비슷한 실례가 아닐까 생각한다. 다행히 아직까지는 신기하다는 듯 같이 한 화면을 바라보는 아저씨들 외에 큰 피드백을 받은 적 없지만 언제 봉변을 당해도 할 말은 없다. 이 자리를 빌어 사과를 하고 싶을 뿐이다.

지하철 민폐남의 경험을 교훈 삼아 이따금 택시를 잡기도 하지만 역시나 가는 날이 장날이다. 운전기사님의 (정말 옆 차와 싸울 것만 같은) 파이팅 넘치는 운전 스타일 덕분에 여유롭게 노트북 화면을 쳐다보기는커녕 미식거리는 속과 욱신거리는 관자놀이를 부여잡아야 할 때도 있었다. 물론 그럼에도 마감은 어찌저찌 끝내긴 했지만 말이다. 우욱, 기사님 조금만 천천히 가주세요. 네네, 속이 안 좋네요. 아니요 술 마신 건 아니고요.

가끔 친구들이나 가족들은 내가 왜 이렇게 비상사태에 자주 처하는지 궁금해 하곤 한다. 그건 회사의 업무 분장이 엉망진창인 탓이 가장 크고, 내 머리와 손이 다 같이 합심해서 느려 터진 영향도 있겠지만 아마 비상사태가 닥치기 전까지는 제대로 일을 시작하지 못하는 내 성격도 한 몫 할 것이다. 참고로 내 MBTI의 끝자리는 P다. 성격이 운명이라고 누가 그랬던가. 시간 여유가 있을 땐 기획이다 뭐다 하며 머리를 굴리는 척하지만 결국 위기에 당면해야 일을 끝내게 되는 내가 잘못이다. 내 잘못이오.

사실 이 글을 시작할 때만 해도 일 앞에서 초연해야 하니 흘려보내야 하니 따위의 교훈을 읊으려 했지만 역시 그런 건 내게 어울리지도 않고 애초에 쓸 수도 없었던 것이다. 비상사태를 극복하는 건 내가 하는 게 아니라 비상사태라는 말만이 진실하다는 생각이 든다. 여전히 나는 비상사태 속에 살고 있다. 모든 일을 계획대로 착실히 해치우는 또 다른 나는 아마 평행세계에서 잘 살고 있을 것이다. 헥헥, 마감이다. 마감. 결국 해내고야 마는 나는 직장인이다.

고수는 고수를 알아보는 법. 비좁은 지하철에서 자꾸 투닥거려서 죄송합니다.

야망백수 : 오늘 글에선 마감 직후의 ‘정신적 헐떡임’이 느껴지네요. 결국엔 해냈다는 찰나의 성취감과 함께 찾아오는 비애-언제까지 이렇게 살아야 하나-가 행간에서 느껴지네요.

언제나 비상사태를 극복하는 것은 비상사태고, 마감을 해내는 건 마감이라고들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 해냄 속에서 어떤 역할을 하고 있는 걸까요? 가끔은 ‘궁지에 몰려서 일에 착수하는 나’와 ‘최후의 최후까지 일을 미루는 나’, 둘 모두가 타자처럼 느껴지진 않나요? ‘낯선 나’들을 바라보는 ‘나’는 도대체 누구이며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까요? 어쩔 땐 돌덩이 같은 피로가 나를 비추는 거울을 와장창 깨버린 것 같단 기분이 듭니다.

어떻게 하면 이 헐떡임을 달랠 수 있을까요? 헐떡임을 잦아들지 않고, 아직 퇴근은 못한 밤 11시. 별안간 휴대폰에 알림이 와서 보니 미국 주식 예약 구매에 성공했답디다. 매주 만 원씩 구독하기 시작한 희망. 호흡을 가다듬고 다시 일을 시작합니다. 내일모레면 월급도 들어오네요. 우리 모두 파이팅입니다.

아매오 : 비정상의 정상화가 어쩌니 저쩌니 하는 이야기를 나눌 때 어렴풋이 짐작했습니다. 사실은 비상이 일상이 삶이 모두에게 보편적인 삶이라는 사실을요. 앞으로 우리들이 살아갈 삶 또한 그 중력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은 수준에 머물지 않을까? 그러고 보면 아무런 경험도 지식도 쌓이지 않았던 당시의 예측 치고는 꽤나 정확합니다. 그러한 삶이라는 것은 허망한 삶의 모순을 감지할 수 있는 평범한 인간이라면 모두 알 수 있는 사실이라는 뜻일까요?

어쨌건 우리는 비상 없이는 단 하루도 흘려보낼 수 없이 살아가고 있습니다. 평범한 일상과 특별할 거 없는 안정감은 비범하고 특별하게 지나오는 과정 끝에 얻어내는 값비싼 결과물인 걸까요? 그와 동시에 저는 “평범이 꿈이네, 평범을 꾸며내”라고 외치던 쇼미더머니 참가자 우원재 군의 중얼거림을 떠올립니다. 어떨까요. 헥헥. 결국 해내고야 말 수 있을까요? 왠지 모르게 오늘도 비상 사태 하나를 넘어왔다는 느낌이 드네요. 내일은 또 어떨까요?

파주 : 언젠가부터 우리끼리의 카톡 첫 인사말은 ‘살아있나?’가 됐죠. 농담이 아니라 진짜 서로의 생존신고를 위해 사나흘에 한 번씩은 꼭 메시지를 보냈던 것 같네요. 뭐라고 답했던가 궁금해져서 카톡방에 ‘살아’를 검색해 보니 이런 말들이 나오는군요.

‘죽다 살았군. 오늘은 또 병났네. 어제 술 먹고 죽었네. 죽은 듯 지냈네. 역에서 잠들었네. 집에ㅣㅈ살아돌아왛으니(*아마도 술 잔뜩 먹은 날)’. 웃음을 얻기 위한 농담이 아니라, 이것들이 진짜 찐 답변이라는 사실이 서글퍼지네요. 우리끼리 하던 말이지만 정말이지 ‘그러다가 다 죽어’가 되진 않을지 참 걱정입니다. 오늘의 늦은 마감과 내일의 이른 마감 사이, 모든 순간을 비상 속에 살고 있는 마감도비님의 삶을 응원합니다. 늘 주고받던 말처럼 조만간 살아서 봅시다.

▲ 모바일

풀칠러A

저는 보통 챙겨온 도시락으로 목요일 점심을 때우며 <풀칠>을 읽습니다. 출근길 지하철에서 메일함에 도착한 <풀칠>의 제목을 확인하고도 손가락을 간신히 참아낸 다음 말이죠. '때운다'는 표현을 쓰는 건 에너지원 섭취라는 명목에 충실한 조촐한 메뉴들 때문인데요. 그래서인지 눈으로 먹는 <풀칠>은 때때로 훌륭한 서브디쉬나 디저트가 되어줍니다. 특히 오늘은 메인디쉬급의 취향저격 문장들로 읽는 내내 하도 피식거린 탓에 옆자리 동료가 이상하게 생각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한 회사에서 5년 차를 보내며 으레 드는 잡생각들로 마음이 어지러운 요즘입니다. 동시에 '건강한 스트레스 해소'에 관심과 노력을 기울이고 있어 오늘의 주제가 꽤나 반가웠는데요. 동료에게 민망할 정도로 킥킥대며 메일을 다 읽고 보니, 문득 저만의 비상사태 탈출법 한켠에 <풀칠>도 자리하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직장인이라는 같은 처지(?)가 주는 동지애와 연대감, 가장 중요한 '비상사태는 나한테만 벌어지지 않았다'는 묘한 안도감까지. 구구절절 많이 길어졌지만, 오늘은 꼭 풀칠팀에 고맙다는 말을 전하고 싶었습니다.

파주

풀칠이 누군가에게 ‘아껴 읽는 존재’가 된다니. 상상도 하지 못한 일이 일어나고 있었네요. 이제 와서 고백하자면 기깔난 인사이트도, 대단한 필력도 가지지 못한 저는 어느 순간부터 블랙코미디로 장르를 굳히게 됐습니다. ‘1피식’만 해도 대성공이라고 생각하는데, N번의 피식을 해냈다고 하니 정말 감격스럽네요. 풀칠러님 덕분에 다음 레터를 보낼 힘을 얻고 갑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풀칠러B

‘X 된 것은 내가 아니고 이 회사 소속의 직원 A로서 X된 것일 뿐 내 인생이 망한 것은 아니다’ 이 말 공감 100%입니다. 정신건강에는 도움이 되지만 늘 이렇게 즐겁게만 생각하다가 회피 만렙에 근접하고 있답니다...헛헛. 순서는 좀 바뀌었지만 저도 풍경을 사서 급한건 알지만 회피하고싶을때 경종을 울리는 용도로 쓰고 싶네요. 사무실에서 쓰기엔 너무 관심을 끌 것 같아 아쉽습니다ㅎㅎ 늘 빠져드는 필력의 공감 글들! 감사합니다~

아매오

정면승부를 하는 게 도리일 텐데, 능력부족인 저는 매번 도망치는 쪽을 택하게 되더라고요. 물론 그것도 제대로 해내지 못해 스불재(스스로 불러온 재앙)에 늘 당하곤 합니다. 그래도 세상에는 죽은 척하는 걸 생존 수단으로 삼는 존재도 있으니까요. 이런 정신승리도 저에게 최적화된 생존 방법이라고 믿어버리기로 했습니다.

풍경 이야기가 나와서 말인데, 조용한 사무실에서 입으로 한번 풍경 소리를 내는 상상을 해봤습니다. 그렇게 되면 아마 당분간은 회사 내에서 시비를 거는 일은 없을 것 같네요. 도저히 참지 못할 일이 생긴다면 제가 한번 시도해 보겠습니다. 그 후기는 언젠가 풀칠 레터로 나눌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