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내규에 따름 [풀칠 205호]

당시 회사에는 근로계약서라는 게 없었습니다...

2025. 8. 20.

풀칠레터 - 밥벌이가 바쁘다지만

안녕하세요, 파주입니다. 입추를 지나면서 살짝 선선해지는 줄 알았는데, 다시 폭염이네요. 부디 무사히 출퇴근하기를 기원하겠습니다.

몇 년 전 여름, 당시 다녔던 회사에서 갑자기 근로계약서를 작성하게 된 사건이 생겼는데요. (어떤 이유로 계약서를 다시 쓴 것이 아니라, 놀랍게도 그 날로 계약서라는 제도가 새로 도입된 겁니다.) ‘우리는 원래 그랬다’라는 사장님의 말로 굴러가던 회사가 바뀌었습니다. 아니, 조금 뒤틀렸다고 해야 정확하겠네요. 계약서가 도입된 후부터 ‘계약서에 명시했듯’이나 ‘내규에 따르면’이라는 말에 의해 의해 움직이게 됐어요.

그래서 규칙이 생기고 체계가 잡혔냐고요? 그 결과는.. 뒤에서 확인하시죠.

입사 초반까지만 해도 당시 회사에는 근로계약서라는 게 따로 없었습니다. 21세기에 이럴수가 있나 싶겠지만요. 법률의 볕이 미처 닿지 못하는 곳이 사회 면면에 남아있습니다. 의연하게 말했지만 사실은 저도 이 회사에 입사한 뒤에야 쉰내 나는 현실을 알게 됐습니다.

몇 년 전 입사한 회사에는 근로계약서가 없었습니다. ‘21세기에 그게 가능해?’ 싶으시죠. 저도 입사 전에는 몰랐습니다. 법률의 볕이 미처 닿지 못하는 곳이 사회 면면에 남아있다는 걸요. 의연하게 말했지만 사실은 저도 이 회사에 입사한 뒤에야 쉰내 나는 현실을 알게 됐습니다.

계약서를 대신한 건 ‘우린 원래 그렇게 해왔다’라는 윗분들의 말이었습니다. 모두가 따라야 할 내규를 대신한 건, ‘신뢰로 일하자’는 사훈 비슷한 구호였습니다. 지금 와서 돌이켜보면 우리가 속해있던 건 회사라기보단 해적 집단에 가까운 조직에 가까웠습니다. 입버릇처럼 말하던 신뢰보다도 기세로 버티던, 법인이라기보단 술김에 맺는 의형제 비슷한 무엇이었기에…

그러던 어느 날, 대표님이 진지한 얼굴로 전 직원을 모아놓고 말씀하셨습니다.

“앞으로는 우리도 근로계약서를 작성하려 한다.”

회의실은 순간 술렁였습니다. ‘아니, 왜 갑자기 문명사회로 편입되려 하는 건데?’ 누군가는 미처 입을 막지 못하고 진심을 토해냈습니다. 충격 발표 직후 대대적으로 열린 담배타임에서는 ‘정부 보조금을 받으려는 목적이다’라는 루머가 돌았지만 누구도 진실은 알 수 없었습니다.

드디어 계약서를 쓰던 날, 사무실은 잔칫집 같았습니다. ‘주 40시간 근무’라는 활자를 보고, 한 동료는 “이게 진짜야?” 하며 국어사전으로 ‘40’과 ‘시간’을 찾아보기도 했습니다. 또 누군가는 자신의 지난 야근을 보답받았다는 생각에 울었습니다. 아, 종이 한장에 이토록 뜨거워질 수 있다니. 이게 정규직의 온기, 아니 열기구나. 그동안 팀장의 기분에 따라 정해졌던 게 퇴근시간이었는데요. 종이 한 장이 제 삶을 6시 정각으로 보장해 준다니, 거의 구원을 받은 듯한 기분이었죠.

하지만 기적은 반나절 만에 깨졌습니다. 18시에 맞춰 일어나 가방을 메자, 팀장이 웃으며 말했습니다.

“그래, 계약서엔 18시 퇴근이지. 하지만 우리 사정은 알잖아.”

그날 저는 깨달았습니다. 계약서는 종이에만 존재하고, 현실에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걸. 오히려 그 종이는 정시 퇴근을 막는 최신식 무기였습니다. 계약서에는 분명히 퇴근 시간이 쓰여 있었는데, 그걸 근거로 ‘그래도 남아야지’를 설득당하는 아이러니. 우리는 이 사건을 ‘계약서 대소동'이라 기록했습니다. 혁명이라고 명명하기엔 바뀐 것이 없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고 하기엔 회사에 불러온 먼지바람이 꽤나 소란스러웠기에…

물론 변화도 있었습니다. 계약서를 쓰며 모두가 4대보험에 가입했다는 건데요. 자연스레 통장에 꽂히는 세후 금액은 3.3%의 기타소득만 떼어갈 때보다 줄어들었다는 것. 사람들은 이를 두고 두 방향으로 갈렸습니다.

하나는 내 돈에 잡히는 돈이 적어지는 상황에 분노하며 과거로 돌아가자는 쪽(이하 회귀파), 다른 하나는 4대보험의 온기 속으로 들어가려면 세금을 내는 게 당연하다는 쪽(이하 적응파)였습니다. 누가 파벌의 민족 아니랄까봐. 근로계약서를 쓴 것만으로도 구성원의 의견이 두쪽이 난 거죠. 그나마 다행인 건 이미 쏟아진 근로계약서를 주워담을 수 없다는 거였습니다.

계약서가 도입된 상황은 바꿀 수 없었지만, 계약서에 명시된 내규는 상황에 따라 변했습니다. 누군가 퇴사 의사를 밝히면, 내규는 갑자기 법전에 버금가는 무게감이 생기는 식이었죠. “계약서에 30일 전 서면 제출이라고 돼 있잖아. 내규에 따라야지.” 그런데 출근 시간에 대해 불만을 제기하면, 내규는 언제나 안개처럼 모호해지기만 했습니다. “시간 따지는 건 프로답지 않아. 그리고 내규에 따르면 말이야…

내규는 심지어 계절을 탔습니다. 여름에는 아무도 슬리퍼 착용을 문제 삼지 않았지만, 가을이 되자 “내규에 따르면 적어도 크록스는 신어야 한다”고 출근 복장의 규칙이 바뀌는 식이었죠. 그냥 슬리퍼가 보기 싫어서 그런 거 아니냐고 되물으면, 이런 답이 돌아올 것 같았습니다. “내규에 따르면 복장이 업무 성과를 좌우한다.”고.

우리는 매일 내규의 눈치를 보며 살았습니다. 내규는 사내 인트라넷에 공지된 적도 없고, 문서로 배포된 적도 없었죠. 다만 대표님이 그날그날 기분에 따라 입으로 읊조리면, 그것이 곧 법이오 내규로 새겨지는 시스템이었습니다. 누군가는 그걸 ‘구두법(口頭法)’이라 불렀습니다. 구두로 내려오는 법, 구두를 신은 사람의 내뱉는 대로 이루어지는 법. 구두 밑창 만도 못한 법. 뭐 그런 의미들을 담아서요.

만약 고용노동부가 감사를 나왔다면, 대표님은 당당히 이렇게 말씀하셨을 겁니다.

“모든 건 내규에 따랐습니다.”

규정집을 요구하면, 관자놀이를 두드리며 대답했겠죠.

“여기 있습니다. 내 머릿속에.”

돌아보면 그 시절의 회사는 기업이라기보다 사이비 종교에 가까웠습니다. 근로계약서는 경전, 내규는 교리, 사장님의 롤은 교주. 다른 점이 있다면, 종교에는 최소한 위로나 구원이 있지만 회사에는 월급밖에 없었다는 사실입니다.

결국 저는 떠났습니다. 다른 회사에 들어가서야 비로소 알았죠. 세상 대부분의 ‘내규’는 문서로 존재하고, 누구나 열람할 수 있으며, 심지어 법과 상충하면 무효가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그걸 처음 알았을 때, 저는 원피스를 발견한 골 D. 로저처럼 한껏 목젖을 보이며 웃었습니다.

아매오 : “이런 말, 신입의 패기로 들리실지도 모르겠지만 저는 워라밸은 정말로 신경 쓰지 않습니다. 오히려 힘든 게 좋습니다”라는 말을 뱉는 동기를 보는 제 표정을 읽어낼 수 있으신가요? ‘저런 말을 육성으로 하다니’로 시작해, ‘오죽했으면’으로 변했을 겁니다.

직무 특성상 실제 업무 시간은 계약서상 근로시간과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그걸 어필 요소랍시고 내세울 줄이야. 물론 흡족한 얼굴로 된장찌개를 퍼먹던 선배의 반응으로 미뤄보아 그것은 나름대로 영리한 전략이었던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채용 플랫폼 ‘희망연봉’란에는 ‘내규에 따름’ 선택지가 있습니다. 그걸 볼 때마다 그 동기가 떠올라요. 자발적으로 숙이고 들어가는 모습. 뭔지도 모르는 내규를 어떻게 따르겠다는 건지. 물론 저 또한 그와 다르지 않겠죠. 흠. 여러모로 씁쓸해집니다.

야백 : 프란츠 카프카의 단편소설 <성>이 생각나는 얘기군요. 주인공이 어떤 성에서 측량 작업을 의뢰받아 낯선 마을로 출장을 떠나서는, 자신을 부른 성에는 끝내 들어가지 못하고 마을을 헤메다 흐지부지 끝나버리는 소설. 성의 규칙은 모호하고, 마을 사람들은 그 질서를 당연하게 따르지만 정작 제대로 아는 이는 아무도 없는 풍경은 ‘내규에 따르’는 우리네 모습과 묘하게 겹쳐 보이지 않나요. 카프카도 보험회사를 다니던 ‘풀칠러’였다는 걸 고려하면, ‘내규에 따름’은 20세기부터 이어져 내려오는 유구한 전통일지도 모르겠네요.

다른 점이 있다면, <성>은 미완이지만 파주의 이야기엔 ‘이직’이라는 끝이 있다는 거겠죠. ‘문명사회로의 편입’이라고 쓰신 것을 보니 그래도 21세기의 ‘내규’가 통하는 곳인 것 같아 다행입니다. 하지만 21세기라고 해서 젖과 꿀이 흐르는 천국인 건 아니죠. 매끈한 애플리케이션으로는 근태를, 촘촘한 스프레드시트로는 성과를 관리하는 알고리즘에 편입된 기분은 어떠신지요?

부조리하고 억압적인 관료제라는 20세기적인 지옥과, 투명하고 피 말리는 성과사회라는 21세기적인 지옥 사이. 실낱같이 얇은 ‘골디락스 존’에 드문드문 놓인, 그럭저럭 다닐만한 회사를 찾아내는 행운이 모든 풀칠러에게 허락되길.

파주 : (*아, 참고로 위에 쓴 저의 이야기는 약간의 픽션과 많은 과장을 담았답니다. 엎질러진 물을 담는 것 같지만 믿어주세요.) ‘내규’라는 탈을 쓴 ‘사장님 맘대로 계약서’를 회상하며, 당시 사장님의 마음은 어떠했을지, 편지를 쓰는 동안 가늠해보게 됐습니다. 스스로를 백성들에게 계약서라는 새 시대를 열어준 성군이라고 생각했을까요? 아니면 이 공간에서 전지전능한 절대자가 되었다는 착각을 했을까요.

그런 맥락에서 <브루스 올마이티>를 떠올렸습니다. 하루 아침에 신이 된 브루스라는 평범한 남자의 일주일을 소재로 한 코미디 영화인데요. 신이 되어도 고민은 있더라고요. 그때 계약서를 도입하던 사장님도 나름의 고충이 있지 않았을지. 세상에, 한참 지난 일이 되니 용서가 되긴 하네요.

저희는 풀칠러님의 이야기도 궁금해요. 일하면서 겪은 일, 늘상 끌어안고 있는 고민, 오늘 편지에 대한 피드백 등등. 무엇이든 좋답니다. 아래 버튼을 눌러 풀칠러님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그럼, 풀칠러님의 평안을 기원하며 이만 줄입니다. 남은 이번 주 동안은 부디 '내규의 횡포'에 열받는 일 없이, 정시 퇴근이 이어지는 무탈한 나날이 계속되길 바라요.

다음 주에는 <소심한 저항> 이라는 주제로 찾아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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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칠러A

상사 통화를 엿듣는 것도 모자라서, 그때부터 상사를 철없는 선배라고 여기다니. 정말 되바라진 직원이군요. < 저도 이 생각을 했습니다 ,, 아아 ,, 저도 누군가에게는 철 없는 딸 ,, 누가 제 통화를 엿들을까 두렵군요. 첨에 통화가 아닌 상황에서는 회사 사무실 한 가운데에서 저렇게 말했다는 줄 알고 놀랐으나 통화였음에 안심했답니다. 편지 형식의 풀칠 너무 좋네요. 히히. 저도 이 주제에 대해 생각해보고 지인들과 대화를 나누겠습니다

아매오

조금 변명을 하자면…듣기 싫어도 들릴 만큼 크고 정확하게 내뱉는 바람에 사무실을 순간 정적에 빠트린 한마디였습니다. 물론 그걸 듣자마자 ‘오늘 점심시간 스몰토크 소재는 이거다’라는 생각부터 했으니 ‘되바라진 직원’이라는 말에 대꾸하기에도 민망하긴 합니다만…;;

풀칠러B

어라 폰트가 조금 달라졌네요 ! 풀칠의 새로운 스타일이라 믿지만서도 약간 답답해보이나? 싶은 생각도 들어 조금의 적응이 조금 필요하겠어요. 언제나 화이팅입니다 !

야백

풀칠러님의 귀한 의견을 반영하여 이번 호엔 다시 고딕체로 돌아왔습니다. 언제나 풀칠러님의 의견을 적극청취하는 풀칠이 되겠습니다.

풀칠러C

제가 몰랐으면 좋았을 것들... 엄마 아빠의 싸운 내용이요. 너무 가까운 사람이라 그런지 누구 편을 들기도 어려워요. 극T성향이라 남들 이야기에 별로 감정이입하진 않지만 엄마아빠의 감정을 어떻게 모른척하고 넘어가겠습니까. 그 내용들을 다 들어주다보면 내 마음이 너덜너덜해져요. 부모님을 사랑하지만, 이런 사소한 것까지 공유하는게 가족이지만, 앞으로도 모르고 살고 싶습니다

파주

이 시대의 알아주는 불효자인 제가 팁을 드리자면, 1)부모님도 자식이 본인 때문에 속상하길 원하지 않는다 2)대부분의 다툼은 지나고 나면 싸운 이유도 잊기 때문에 외면해 주는 게 도리다 3)부모님도 남이다…! 를 되뇌며 기다려 드린답니다. 쓰고 보니..이거 너무한가요. 이번 주엔 너덜너덜해진 마음이 회복될 수 있는, 충분한 시간과 거리를 누리셨길 바랄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