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소심한 저항 [풀칠 206호]

화장실은 반드시 회사에서

2025. 8. 27.

풀칠레터 - 밥벌이가 바쁘다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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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풀칠러님. 야백입니다.

그래도 입추가 지났다고 아침저녁으로 시원한 바람이 부는 것 같네요.

출퇴근이 조금이나마 더 수월해지셨길 바랍니다.

오늘 풀칠레터의 주제는 <소심한 저항>입니다.

왜, 있잖아요. ‘화장실은 반드시 회사에서’, ‘퇴근 시간 10분 전 텀블러 씻으러 가기’ 같은 것들.

마냥 순응하는 것도 아니고, 확 뒤집어엎어버리는 것도 아닌, 나만 아는 반항을 하게 되는 건 어째서일까요?

얼마 전에 별로 안 친한 회사 동료와 퇴근길이 겹친 적이 있습니다. 어떤 주제로 스몰토크를 해야 하나 고민하고 있었는데 그분이 먼저 운을 떼더군요.

“이런 거 생각해 본 적 있으세요? 똥을 반드시 회사에서 싼다면 한 달에 얼마 정도 이득을 보는지에 대해서.”

적나라한 표현에 조금 당황하긴 했지만, 이런 주제로 제게 대화를 걸었다는 게 뭔가 저를 믿을만한 사람으로 생각하는 것 같아서 기분이 나쁘진 않더군요. 이를테면 이런 거죠. ‘이봐, 당신은 딱 보니 우리 쪽 사람이야. 똥을 싸면서 회사의 주머니를 턴다는 게 웃기잖아.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범생이나 끄나풀로 여겨지는 것보다야 레지스탕스 쪽이 아무래도 조금 더 멋지다고 생각하는 편인지라 대화에 응할 맘이 들었습니다.

“흠. 한번 생각해 볼까요. 하루에 10분씩이라고 가정하고. 계약 상 하루 근무시간은 8시간, 480분이죠. 10분은 2% 정도 되네요. 그럼 매일 회사에서 똥을 싸러 간다고 가정하면 월급의 2% 정도는 똥을 싸면서 받는 셈이네요. 급여 명세서에 항목으로 찍히진 않지만요. 이거 나쁘지 않은데요.”

“그러니까요. 유명해지면 똥을 싸도 돈을 번다고들 하는데, 우리 같은 평범한 사람들에게도 방법이 있었던 거죠.”

여기까지 얘기를 나눌 때쯤 우리는 지하철역에 도착했고, 대화는 흐지부지 마무리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이후부터 화장실에 가서 큰일을 보려고 할 때마다 문득 아깝다는 생각이 드는 거 있죠. ‘아, 지금 이걸 회사에서 했어야 했는데…’

물론 시간을 칼같이 계산해서 돈으로 받고 있는 것도 아니고, 퇴근하고도 일 생각에 골머리를 썩이는 처지이지만만, 그럼에도 합법적인 선에서 딴짓을 하면서 돈을 벌 수 있는 기회를 날렸다는 게 좀 아깝더라고요. 네, 저는 배변 활동의 경제성에 대한 논의 덕분에 볼일의 장소와 시간까지 최적화하고 싶어 하는 '호모 이코노미쿠스'로 거듭났습니다.

하지만 제아무리 경제적인 인간이라고 해도, 배변 활동을 100% 통제하는 건 불가능하죠. 어느 날엔 길에서 배탈이 나는 바람에 회사도 집도 아닌 제 3의 장소에서 용변을 보게 되었습니다. 식은땀을 흘리며 화장실을 찾는 와중에도 ‘아 회사에서 싸야 하는데’라는 생각이 드는 스스로가 미친놈처럼 느껴지더라고요. 살짝 억울하기도 했어요. 회사에서 싸지 못한 게 억울하다는 게 아니라, “이걸 어디서 싸느냐”까지 관리하려 드는 삶에 대한 억울함.

어쩌다 이렇게 된 걸까요. 저는 낯선 변기 위에 앉아 지난 날을 되돌아보기 시작했습니다. 왜 나는 이렇게까지 이득을 취하고 싶어 하는가.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가는 숱한 야근들. 맨날 야근하면서 저녁 시켜 먹다 두툼하게 쪄버린 뱃살. 연락이 끊긴 친구들. 이대로 가다간 앞으로 만날 날이 100번이 채 안 남았을 엄마 아빠. 다음으로 미뤄두고만 있는 애인과의 약속들.

네, 압니다. 요즘 같은 때 직장이 있다는 것은 좋은 일이란 걸. 배부른 소리로 들릴 위험을 무릅쓰고 투덜대 본다면, 아무래도 저는 직장을 갖기 전엔 미처 예상하지 못했던 수많은 ‘trade-off’들까지 긍정할 만큼의 보상을 받고 있는 건 아닌 것 같습니다. 볼 일을 회사에서 봐야 했다는 후회는, 그게 실질적인 이익을 가져다줄 거라고 진심으로 믿고 있어서라기보다는, 이렇게라도 회사를 뽑아 먹지 않으면 억울해서 견딜 수 없다는 뒤틀린 보상심리였던 거죠. ‘똥은 가급적 회사에서’라는 농담이 은밀하지만 널리 유통되고 있단 건 회사를 대상으로 손해 보는 거래를 하고 있다는 감각이 널리 퍼져있다는 방증일 테고요.

웃기지 않나요. 노동 시장에서의 부당거래가 배변활동까지 경제논리에 포섭시키는 지독한 ‘호모 이코노미쿠스’들을 낳는다는 것이. 그런데, 우리가 이 거대한 부당함에 저항할 수 있는 방법은 정녕 ‘똥은 회사에서’ 뿐인 걸까요? 정말로? 그날, 저는 변기에 아주 오래 앉아 있었습니다.

그리고 또 다른 날 아침,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출근 시간 직후에 화장실에 갔습니다. 만석이더군요. 인간의 소리가 요란하게 울려 퍼지고 있었고요. 그 소리를 듣고 있자니 저 속의 동료들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지 궁금해졌습니다. 이득을 보고 있다는 쾌감일지, 억울함을 달래는 보상심리일지, 아니면 여전히 머릿속에서 스프레드시트를 굴리고 있을지.

그때 누가 등을 툭툭 치더군요. 며칠 전, 처음으로 ‘배변의 경제학’을 전수해준 그 동료였습니다.

“기다리시는 거예요?”

“네.”

“열심히시네요. 저는 그냥 잠깐 '화캉스'.”

장난기 어린 눈빛에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습니다. 그 웃음 덕분에 저는 비로소 <내가 할 수 있는 건 똥을 싸는 것뿐이다>라는 멜랑콜리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생각해 보면 이렇게나 많은 사람들이 일하는 시간에 똥을 싸고 있다는 건, 그리고 그걸 농담거리로 삼고 있단 건 대단히 유쾌한 일입니다. 이 농담 덕분에 화장실은 단순히 생리적 현상을 해결하는 공간에 그치지 않고 시스템에 난 균열이 되죠. 바로 저기 밖 사무실에서는 인공지능이나 로봇처럼 행동할 수 있겠지만 여기 화장실 안에서는 누구도 인간임을 숨길 수 없습니다.

이제 저는 화장실에 빈자리가 없으면 기꺼운 마음으로 기다리며, 동료 노동자들에게 연민과 동지애를 느끼려 노력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제 차례가 되면, 머릿속으로 ‘똥캉스를 해야만 했던 이들을 위한 변론’을 써내려가죠.

첫째, 우리는 인간입니다. 화장실에 가야 한다는 게 그 증거입니다.

둘째. 화장실이 증명하고 있듯이, 인간의 시간을 거래 가능한 것으로 보는 노동시장의 논리에는 빈 틈이 있습니다. 우리는 매일 ‘출근 몇 시부터가 회사의 시간인가’, ‘점심시간은 누구의 시간인가’ 같은 애매한 경계 속에서 살아갑니다. 하지만 아무리 효율성을 강요해도, 인간의 몸은 계약에 맞춰 흘러가지 않습니다. 그래서 화장실에 앉는 순간만큼은, 시간을 통째로 사고판다는 사고방식이 얼마나 허술한지 원초적으로 드러나는 셈이죠.

셋째. '똥캉스'라는 농담에 깃든 저항정신은 길게 보면 결국엔 회사의 경쟁력에 도움이 됩니다. 숱한 철학자들의 논의를 참고해 보자면, 권력은 언제나 통제와 동일성의 시스템을 만들려고 하기 때문에 균열이 없으면 결국 그 시스템은 자기 복제와 폐쇄로 이어져 도태된다고 보았습니다. 하지만 소심한 저항이 숨통을 틔워 준다면, 권력이 빈틈없이 작동해서 복제와 반복만이 남는 걸 방지해 줄 수 있죠.

또 소심한 저항은 위험 관리에도 도움이 됩니다. 똥캉스라는 농담은 구성원과 회사의 이해관계가 서로 맞지 않는다는 경보이기도 합니다. 이 경보를 제때 포착해서 대응할 수만 있다면 구성원과 회사의 이해관계를 정렬시킬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이해관계가 정렬된 조직이 그렇지 않은 조직보다 더 나은 생산성을 낼 수 있다는 건 두말할 필요도 없고요.

아이고, 화장실에서 너무 오래 있었네요. 이만 자리로 돌아가야겠습니다.

이번 주도 바쁘시겠죠. 바쁜 와중에도 우리의 소심한 저항이 멈추지 않길 바랄게요.

아매오: 한참 다이어트 하던 때 경영지원 담당자와 합심해 탕비실 간식 라인업을 바꿔놓은 적이 있습니다. 그 일은 서서히 진행됐어요. 처음엔 몇몇 과자나 두유 등을 같은 브랜드의 저당, 저지방 제품으로 슬쩍 교체했습니다. 그 다음에는 프로틴 음료도 끼워넣었고요. 지방 보충용 간식으로 작은 스트링 치즈를 추가해봤습니다. 갈수록 과감해져 아침 대체용 구운 계란 한 판을 들여놓기도 했죠. 우리 팀 탕비실은 몇 달에 걸쳐 제 입맛에 맞게 바뀌어갔습니다.

그 기간엔 정말 ‘일할 맛’이 났습니다. 물론 그게 오직 ‘내 마음에 드는 간식’이 불러온 결과만은 아닐 테죠. 하지만 아침에 출근해서 계란 2개와 두유를 까먹을 때, 오후 간식으로 스트링 치즈를 돌려먹을 때, 퇴근 직전 프로틴 음료를 마시고 바로 헬스장으로 갈 때 저는 분명히 ‘이득 보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연봉협상을 비롯해 회사로부터 받는 대우에선 아무래도 느끼기 어려운 감각이죠. 그걸 이토록 쉽게 얻어내다니. 어느 날은 출근이 즐겁더군요. 참…

…젠장. 사실은 제가 당한 것일까요? 간식에 대한 의견을 매번 받아서 반영해주는 형태에서는 얻을 수 없는 ‘효능감’을 주기 위해 이렇게까지…? 제가 너무 나간 것일지도 모릅니다. 그렇지만 소심한 저항의 틈을 허용하는 것은 직원에 대한 회사의 조련 스킬 중 하나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강하게 드네요. 역시 회사는 직원 위에 있는 것인지…

파주: 저는 ‘법인카드를 쓸 때 비싼 음료 시키는 사람’이라는 이상한 프레임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팀회의를 앞두고 법인카드로 음료를 구매하는 기회가 생길 때면 대다수가 주문하는 아이스 아메리카노가 아니라, 유기농 오레오쉐이크나 핸드드립 커피를 주문한다는 건데요. 틀린 말이 아니라 반박하지는 못했지만 말입니다. 여기에는 야백님의 X캉스만큼이나 진지한 사연이 있습니다.

일단 저는 카페에서 늘 핸드드립이나 시그니처를 주문합니다. 아주 신맛 나는 커피를 좋아하는데, 대부분의 아아는 고소한 원두를 쓰시거든요. 법인카드를 쓰니까 비싼 걸 주문한 게 아니고, 비싼 걸 주문하는 애한테 법인카드 쓸 기회가 주어진 겁니다 흐흐…

두 번째 이유는 과거 로망이었던 카페 사장님들에 대한 리스펙입니다. 얼마나 커피가 좋으면 가게를 차렸을까요. 좋아하는 걸로 사업을 할 만큼이라면 본인의 취향에 대한 자부심도 꽤나 강할 테고, 고르고 고른 원두에 그 취향이 묻어있을 겁니다. 그쵸? 그러니 사장님들이 공들여 고른 원두를, 손수 내릴 수 있는 방법(=핸드드립)을 주문한다? 이것 이상의 리스펙은 없다고 봅니다 전.

왜 법인카드를 내면서 선심을 쓰냐는 말을 스스로에게도 던지고 싶어지네요. 하지만 전 아아를 주문해 1-2천 원 아끼는 것보다 핸드드립 커피를 마시고 제안서에 들어갈 문구를 하나 더 쥐어짜는 선택을 하겠습니다.

야백: 오늘 편지를 쓰면서는 제임스 C.스콧의 <지배, 그리고 저항의 예술>이라는 책을 들춰봤습니다. '소심한 저항'의 의미를 보다 곱씹고 싶으신 풀칠러 님들께 추천합니다.

저희는 풀칠러님의 이야기도 궁금해요. 일하면서 겪은 일, 늘상 끌어안고 있는 고민, 오늘 편지에 대한 피드백 등등. 무엇이든 좋답니다. 아래 버튼을 눌러 풀칠러님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그럼, 풀칠러님의 평안을 기원하며 이만 줄입니다. 남은 이번 주 동안은 부디 '내규의 횡포'에 열받는 일 없이, 정시 퇴근이 이어지는 무탈한 나날이 계속되길 바라요.

다음 주에는 <너 요즘 말 많이 나와>라는 주제로 찾아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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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칠러A

예전에는 정말 구직할 때 '급여 : 내규에 따름'이 뭔지 몰라서 당황스러웠거든요. 근데 이젠 느낌이 와요. '최저임금 줘도 일 할 사람 구함!'으로 보여요. 이전 회사는 꼼꼼한 내규가 있는 곳이었는데, 이제는 프리랜서가 되어 내가 '내규 그 자체'인 사람이 되어버렸어요. 야생에 내던져진 것 같아 무서워요!

아매오

숨기는 데서 구린내가 나기 마련이죠. 하하...그래도 요즘엔 적지 않은 기업이 채용공고를 낸 포지션에 책정한 급여 범위를 명확하게 밝혀주는 것 같습니다. 그나저나 프리랜서가 되어 스스로 '내규 그 자체'인 사람이 돼 버렸다니. 프리랜서의 셀프 컨펌에 대해 썼던 다혜 님의 글(풀칠 197호) 이 떠오르네요. 이 글이 풀칠러님의 무서움을 약간이라도 덜어내는 데 도움이 되길 바랍니다!

풀칠러B

Anything is possible in a Startup이라고들 하죠. 그게 단순히 혁신만을 말하는 것은 아님을 조금이라도 씬에 몸담은 분들은 알지요...ㅎㅎ스타트업의 그런 '유연함(가장 예의 바른 표현...)'은 저의 고개를 갸우뚱하게 만들었지만 동시에 어떤 자유함을 주기도 했던 것 같아요. '아 결국 세상 규칙이라는 게 다 협의와 합의의 산물일 뿐이구나'라고요. 지금이야 우리끼리의 협의로 '저 사람은 대표요, 나는 직원이요'이지만 문 박차고 나가면 내규가 뭔 소용이고 이 회사의 안녕은 나와 무슨 상관인가 싶더라고요. 대표 자리에 있는 저 분도 어느 동네 어느 집에 사는 평범한 이웃일 뿐인 걸요. 결국 내가 어찌할 수 없는 수많은 규칙 속에서 나는 어떻게 그 상황과 잘 협의하며 살아가는가가 삶의 여정 같습니다. 슈레딩거의 고양이 같은 내규 속에서 살아남은 작성자님의 지금 여정은 조금 더 단단하고 평안하길 :)

파주

우당탕탕 스타트업 썰은 저도 건너건너 들은 적이 있습니다. 제가 접한 썰은 대부분 21세기에도 ‘짐이 곧 법'이라는 규칙이 적용되는 무법지대였습니다. (물론 아닌 곳들도 많겠지만요.)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건 좋은 쪽으로도, 아닌 쪽으로도 무한하게 뻗어나가더라고요. 우당탕탕 스타트업 에피소드는 짧은 글로 미처 담을 수 없기에 추후에 기회가 된다면 에세이 한 편으로 엮어보겠습니다. 풀칠러님도 회사의 대표님(이자 동시에 동네 아저씨이기도 한 )의 변덕으로 괴롭지 않으시기를 바라며.. 오늘도 읽어주심에 감사드립니다.

여기까지 읽어주신 풀칠러님이 풀칠의 대주주이십니다.

대주주 풀칠러 님께 이번 주의 풀칠 팀 소식을 공유드립니다.

1. 풀칠러님의 기고를 기다립니다.

풀칠의 시작이 '푸념의 규모를 키우자'였던 것을 아시나요? 혼자라면 그저 푸념으로 그치고 말 이야기들이지만 자꾸 나누다 보니 뭔가 남는 것 같더라고요. 풀칠러 여러분도 이 여정에 함께해보시는 건 어떨까요? '에세이 기고하기'와 '인터뷰 참여하기', 두 가지 방법을 마련해놨습니다. 한번 살펴봐주셔요!

☞나의 풀칠하는 이야기 들려주기

2. <풀칠러 스케치>를 모아서 책으로 엮고 있습니다.

지인들은 그 돈으로 주식을 사는 게 더 낫지 않겠냐고 하더군요. 맞는 말인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