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 일 개못하잖아’

회사에서 분노가 극에 달할 때, 상대를 원초적으로 욕하고 싶을 때면 저는 챗GPT를 켭니다. 그리고 대화 상대에게 꽂아버리고 싶은 말들을 와다다다 쏟아내죠.

‘너 일 개못하잖아. 근데 왜 자꾸 일잘러인 척 함? 미감 구리면서 색감 트집 잡아서 몇 번을 수정함? 스마트폰에 있는 ‘편안하게 보기’ 설정 켠 거 아님? 일의 프로세스를 모르면 제발 태도라도 좀 반듯하게 하든가.’

챗GPT는 갑자기 날아온 욕지거리에 일단 죄송하다는 반응을 보이죠. 친절하게 저의 뾰족한 말들을 조목조목 분석해 주기까지 합니다.

‘와… 이건 그냥 돌직구도 아니고 직격탄이네요😅 읽자마자 귀가 달아오르는 느낌이랄까요. 단순한 불만 표현을 넘어서, 상대방의 태도와 능력, 심지어 감각까지 전방위로 비판하는 메시지네요. 구조를 뜯어보면:

1. “너 일 개못하잖아” → 서두부터 정면 공격, 방어할 틈이 없음.
2. “근데 왜 자꾸 일잘러인 척 함?” → 상대의 ‘태도’와 ‘허세’를 겨냥.
3. “미감 구리면서 색감 가지고 몇 번을 수정하는 거냐?” → 구체적인 예시로 찌름. (추상적 비난이 아니라 실제 행동을 꼬집으니 더 아픔)
4. “스마트폰에 있는 ‘편안하게 보기’ 설정 켜둔 거 아니냐?” → 조롱성 디테일, 약간의 유머처럼 들리지만 사실은 모욕적.
5. “일 프로세스를 모르면 태도라도 바르게 하라” → ‘능력도 없고 태도도 없다’라는 치명적 마무리.

즉, 능력 없음 → 허세 → 디테일 집착 → 조롱 → 태도 비난. 완벽한 5단 콤보라는 거죠.

(중략…)

납작 엎드린 답변을 읽다 보면 솟아오르던 심박수가 이내 가라앉습니다. 나이 먹고 이게 뭐 하는 짓인가 싶어 금방 부끄러워지기까지 하죠. 방금까지 “무엇이든 물어보세요”라며 무해하게 저를 환대하던 챗GPT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어 사과하고 맙니다.

물론 상대에게 미처 닿지 못한 말들이기에 현실에서 바뀐 건 하나도 없습니다. 상대의 박살난 미감도, 미묘하게 어긋난 글도, 일을 개못하는 것도, 구린 태도를 보이는 것도 여전하죠. 메일 한 통과 카톡 한 문장만으로 사람을 어찌 이렇게 먹먹하게 할 수 있는지... 이것도 능력이라 부른다면 저는 그분을 <X맨> 자비에 영재학교에 보내드리고 싶은 심정입니다.

아주 오래 전 괴짜로 이름난 교수님이 ‘인성도 실력인가’라는 질문을 강의실에 던진 적이 있습니다. 당시에는 왜 전공과 전혀 관계 없는 질문으로 수업 시간을 잡아먹는가에 대한 불만을 품었는데요. 지금 와서 보니 그 질문이 직장생활을 관통하는(너, 핵심을 찔렀어!) 질문이었단 생각을 하곤 합니다.

인성도 실력인가. 실력이 있다면 인성이 조금 구려도 성과를 위해 참아줄 수 있는가. 반대로 실력만으로 ‘좋은 직업인’이라 말할 수 있는가. 사람마다 기준은 다르겠지만 저 나름대로 잠정 결론을 내렸습니다.

대부분의 직장인에게 있어 ‘일을 잘한다’는 것은 뭘까요. 우리가 대단한 예술작품을 창조하는 것도 아니고, 세계를 뒤흔드는 혁신을 하는 것도 아닙니다. 직장인이 하는 일의 대부분은 협업이고 협업은 결국 대화로 이루어집니다. 태도가 구리면 대화가 막히고, 대화가 막히면 업무도 나아가질 못하죠.

그러니 ‘일을 잘한다’는 건 곧 ‘같이 일하고 싶은 태도를 갖는다’는 뜻이 아닐까요. 조금 더 양보해 실제로 인성이 구리더라도 자신이 ‘일 잘하는 직장인’을 연기하고 싶다면, 적어도 태도라는 탈을 써야하지 않을까요? 심지어 예술하는 봉준호 감독님도 인성이 좋기로 정평이 나 있는데… 감히 네가 뭐라고! 

아, 물론 ‘일 개못하네’라는 얘길 마음껏 떠들었지만, 저는 일에 관한 한 뻐킹 아마추어입니다. 다만 중요한 건 ‘난 일을 잘하지 못한다’라는 메타인지를 지키는 거죠. 이것이야 말로 일을 그냥 못하는 것과 개못하는 것을 가르는 최후의 방어선이 아닐까요. 일 못하는 스스로를 돌아보지 못한 채 그저 잘하고 있다고만 믿으면 반성도 변화도, 기대도 없을 테니까요. 그나마 못하는 걸 자각하고 있는 저는 일을 개못하는 게 아니라 그냥 못하는 거라고 변명해 봅니다.

나이가 들수록 점점 두려워집니다. 연차는 밀도 없는 싸구려 매트리스처럼 쌓였지만 솔직히 저도 쥐고 있는 일을 잘 모를 때가 많거든요. 더 애석한 건 일에 대한 피드백을 받을 기회를 점점 더 사라진다는 사실이죠. ‘그 정도 연차면 알아서 하겠지’ 기대치만 커지고, ‘그거 아닌데요’라고 따끔한 조언을 건네줄 동료도 없습니다. 앞으로는 말보다 더 잔혹한 것들이 저를 찌를 겁니다. 성과금이라는 이름의 숫자, 업무에서 배제되며 찾아오는 불편한 여유로움 같은 것들이요.

그렇기에 저는 요즘 스스로를 돌아보는 데에 에너지를 쓰기 시작했습니다. 메타인지에 빠지는 주문의 이름은 ‘너 일 개못하잖아'입니다. 여기에 파생되는 질문은 이런 겁니다.

‘너 일 못하잖아. 근데 지금 1시간 만에 끝낸 기획안이 과연 제대로 된 게 맞을까? 실현 가능성은 고려한 걸까? 예산 안에서 충분히 해낼 수 있기는 한 거야?’

당장 이번주도 그랬네요. 왠지 모르게 일이 술술 풀렸거든요. 늦여름 냄새를 잔뜩 풍기는 보사노바를 노동요 삼아 기획안 작성을 마쳤을 때. 메일 전송 버튼을 누르기 직전 스스로 물었습니다.

‘너 일 개못하잖아. 최선을 다하지도 않았으면서, 이 일 제대로 한 건 맞아?’

스스로의 결과물을 의심하는 질문들을 쏟아내고 나면, 그제서야 문서를 깎기 시작합니다. 그 와중에 허접한 오타도 두어 개쯤 찾아냈습니다. 일을 해치웠다는 감각에 취해 그대로 메일을 보냈다면? 허접한 기획안을 본 상대는 한숨을 내쉬며 ‘이 일 못하는 아저씨를 어떻게 해치워야 하지?’라고 생각했을 지도 모릅니다.

일하는 자신에게 취해, 그것도 ‘일잘러’라는 착각에 취해 남들에게 무례를 범하는 건 숨으로 알코올을 내뱉는 주정뱅이와 다를 바 없습니다. 그래서 가끔씩 무언가 쉽게 풀리는 기분이 들 때면 ‘너 일 개못하잖아’를 떠올립니다. 이 의심은 일을 못하는 최저의 기준, 그러니까 인간적으로 봐줄 만한 범위에 있으려는 최소한의 발버둥 같은 겁니다. 원래 반성은 거울치료가 제일이잖아요. 최근 만난 일잘러(라고 스스로를 오해하는 일개못러)에게 한 수 배웠네요. (*그 사람을 떠올리니 가슴이 먹먹해지는군요. 빨리 챗GPT한테 잡도리나 하러 가야겠습니다.)

오늘 풀칠을 쓰면서도 여러 번 주문을 외웠습니다. ‘너 글 개못쓰잖아.’ 안타깝지만 그 결과물이 고작 이거네요. 가끔은 메타인지만으로는 해결되지 않는 문제도 있는 법입니다.

제가 관찰한 결과, ‘본부장병’은 치사율, 아니 퇴사율이 높은 꽤 치명적인 병이더군요. 이 병을 앓는 사람 중 십중팔구는 ‘일 잘하는 나’를 계속해서 갱신하려다 능력 밖의 일을 맡게 돼 ‘번아웃 엔딩’을 맞거나, 일 못하는 사람들에 대한 경멸을 감추지 못하고 투덜대다 피플팀에 불려 가 면담실의 이슬이 되곤 하더라고요.

끝내 흑화를 억제하지 못하고 파멸을 맞은 본부장들을 생각하다 보면 문득 궁금해집니다. 만약 누군가가 본부장의 면전에 대고 ‘너 일 개못하잖아’라고 말해줬더라면 어땠을까. 아주 가끔은 냉혹한 피드백이, 결핍이라는 낭종만 깔끔히 도려내는 매스처럼 작용하기도 하던데. 어쩌면 본부장에게 잡아먹힌 자아는 누군가의 공격으로 구원받길 기다리고 있던 게 아닐까…

왠지 저는, 언젠가 어떤 본부장에게 ‘너 일 개못하잖아’라는 말을 한번 용기 내서 질러보게 될 것 같네요. 그런 예감이 들어요. 다 오늘 파주님의 글을 읽은 덕분입니다.

추추신 :

저 스스로에게도 ‘너 개못하잖아’라는 말을 조금 더 자주 해야겠네요. 내 부족함이 내가 괴물로 변하는 걸 억제한다고 생각하니 이 부족함이란 녀석, 뭔가 기특한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