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의 통제를 벗어난 것들 [풀칠 211호]

어째서 나에게 이런 일이

2025. 10. 1.

풀칠레터 - 밥벌이가 바쁘다지만

안녕하세요, 풀칠러 님. 파주입니다.

이번 주 주제는 ‘나의 통제를 벗어난 것들’입니다.

저는 요즘 인생을 건 배팅을 하고 있습니다. (강원랜드나 마카오 여행을 계획하고 있는 건 아니고요.) 벌이는 일의 규모가 커질수록 제가 원하지 않던 방향으로 일이 흘러갈 때가 많더라고요. 그래서 요즘 저의 통제를 벗어난 것들에 대해 분노와 우울감에 휩싸였는데요. 그러던 참에 풀칠을 쓸 차례가 되었군요.

이번 호에는 ‘통제를 벗어난 것들’을 향한 저의 울분을 가득 담았습니다. 언제나 그렇듯 우스꽝스러운 이야기가 될 테니 모쪼록 재미있게 읽어주시기를 바랍니다. 오늘도 메일 열어주셔서 반갑고 또 고맙습니다.

다음 주는 풀칠 쉬어갑니다.

이제 하루만 더 버티면 기다리고 기다리던 연휴입니다.

한 주 푹 쉬면서 세이브 원고도 만들고, 잠도 실컷 자려고요.

풀칠러님도 고단한 밥벌이에서 잠시 떨어져서,

사랑하는 사람들과 행복한 시간 보내시길 바라요.

요즘 저는 ‘붓다의 말씀’을 듣습니다. 듣는다기보단 켜둔 채 잠든다는 쪽에 가깝지만요. 종교에 관심을 가지게 된 건 아닙니다. 그저 통제 불가능한 것을 한참이나 미워하다가 지쳐버려서, 이제는 그것들을 품는 방법을 배우고 싶어졌습니다.

누워서 잠들기 전까지 2시간 30분. 붓다가 전하는 말씀은 결국 이 한마디입니다.

‘고통이 너를 찾아오는 게 아니라 네가 고통을 붙잡고 있는 것이다’

애초에 고통이라는 건 공기처럼 항시 떠다니는 존재이고, 내가 그 고통이란 걸 구태여 쥐고 있기에 괴롭다는 말이죠. 그러니 힘을 들여 쥐고 있는 고통을 놓으면 된다는 게 결론입니다.

그래, 힘들게 고통을 쥐고 있을 필요는 없지. 그렇게 결론을 내곤 이너피스 하려던 찰나에 또다시 고통이 밀려옵니다. 괜히 열받아 벽을 치고 씩씩거리다 지쳐 잠에 들죠. 고통을 놓으라고요? 그게 됐으면 제가 이러고 있겠습니까? 벌써 열반에 이르렀다면 이미 꿀잠에 들었겠죠. 저 같은 인간들이 그 단계에 이르지 못하기 때문에 그들을 성인이라 부르며 아직까지 칭송하는 거 아닐까요.

자, 이제 제가 쥐고 있는 고통을 돌아보겠습니다. 이사를 준비하는 요즘 저를 괴롭히는 건 불확실성입니다. 정확히는 나의 통제를 벗어났기에 확실하지 않은 것들이죠. 대부분의 일은 동일한 프로세스를 거쳐야 합니다. 일단 1단계가 정해져야 2단계로 → 2단계가 갈무리되어야 → 비로소 3단계에 착수할 수 있죠. 딱딱 들어맞을 필요는 없지만 어느 정도 예상은 가능해야만 합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일이 그렇듯 이 프로세스가 정확히 지켜지는 일은 드뭅니다. 분명 며칠 안에 끝난다는 공사는 사전 작업에만 약속한 며칠이 지났고요. 당연히 그 뒤에 진행해야 하는 일(청소, 이사, 배송 등…)은 예약과 취소를 반복하며 잔뜩 꼬여버렸습니다. 날마다 뒤바뀌는 일정에 정말이지 미쳐버릴 것만 같았죠. 두피를 긁어대다가 바닥에 떨어지는 머리카락을 보면서 또다시 스트레스를 받는 악순환도 겪었습니다.

‘내 인생인데, 어째서 내가 통제할 수 없는 것들로만 가득한 거지?’ 이사 하나 하면서 이 모든 것을 야기한 세상의 탓을 하기까지 이르렀습니다. 이렇게 못난 마음으로 하루를 꽉 채우고 나면 심신이 누더기가 된 채 침대에 눕습니다. 괜히 억울해서 잠도 오지 않죠. 그럴 때마다 저는 다시금 부처님을 찾아갑니다.

다시,

-고통이 너를 찾아오는 게 아니라 네가 고통을 쥐고 있는 것이다…

-그래, 쥐고 있던 고통을 놓아주자

-아니… 근데 진짜!

의 반복이 반복됩니다.

이사가 뜻대로 풀리지 않으면서 오갈 곳 없는 신세가 되어버렸습니다. 부득이하게 열흘 정도를 빌린 방에서 지내야 했죠. 여러 개의 가방을 온몸에 걸친 채 방문을 여는 순간, 오래된 건물에서 나는 특유의 지린내가 풍겨왔습니다. 이것은 필시 사람의 것은 아니고 쥐의 오줌 냄새일 거라고. 맡아본 적도 없으면서 단번에 직감할 수 있었죠. 갈 곳을 잃은 인간이 자기연민에 빠지기에 너무나 적합한 장소였습니다.

꿉꿉한 이불에 몸을 넣자마자 온갖 생각이 다 들었습니다. 이사 일정을 여유롭게 잡았더라면. 아니, 애초에 이사를 선택하지 않았더라면… 눈을 감자 퀴퀴한 냄새가 선명해졌고, 억울함의 농도는 실시간으로 짙어졌습니다.

마음의 평안을 찾기 위해 다시 붓다를 찾았습니다. 2시간 30분 짜리 분량의 영상이 재생되는 동안 입으로는 욕설을 내뱉고 주먹을 벽에 내질렀습니다. 왜 내가 선택하지도 않은 것들 때문에 고통을 받아야 하지? 적어도 내가 선택한 것이 이 결과를 초래했다면, 나는 이만큼 괴롭지 않았을 거란 확신까지 들었습니다.

그렇게 곰팡이와 동침한 지 일주일째. 일 년 주기로 만나는 (사회인 기준으로는 꽤나 가까운 사이인) 전 직장 동료가 있습니다. 저는 그를 ‘북촌의 현자’라 부르는데요. 세상 시니컬해 보이지만 본인과 함께 사는 고양이에게는 누구보다 스윗한 분입니다. 풀칠에서 ‘철없는 이야기’를 담당하는 제가 이따금씩 그분에게 조언을 얻곤 합니다. 그럴 때마다 늘 그럴듯한 답을 던져주시곤 했습니다. (풀칠 레터 192호 객원 당번 ‘밤만쥬’로 참여해 주신 적이 있습니다.)

최근 제가 겪고 있는 사건사고를 숨 쉴 새도 없이 털어놓았습니다. 빌어먹을 이사와 망할 숙소의 상태. 요즘 제 삶을 둘러싼 통제 불가능한 것에 대한 모든 것들. 왜 제가 선택하지도 않은 것들 때문에 이렇게 고통받아야 하는지를요.

그러자 상대는 질문을 질문으로 받았습니다.

‘그것이 왜 파주씨의 선택이 아니라고 생각하시죠? 모든 선택은 패키지입니다.’

당연한 말이지만 꼭 필요한 한마디였습니다. 원래 맨홀에 빠진 사람은 내가 어디에 있는지조차 모르는 법입니다.

만약 이사를 하지 않았더라면? 그 이전에 같이 살기를 결심하지 않았더라면? 그보다 더 이전에 이 사람을 만나지 못했더라면?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 감당할 수 없는 선택지에 다다르자 머리가 깨끗해졌습니다. 곰팡이방에 잠시 머무르는 게 선택의 패키지라면 기꺼이 감수할 수 있겠단 결론에 이르렀거든요.

사실 따지고 보면 곰팡이 향이 풍기는 그 방을 고른 것도 전부 저의 선택이었습니다. 심지어는 여러 선택지 중 베스트 초이스라 자신하며 결제까지 일사천리로 마쳤죠. 제가 선택한 것임을 망각한 건 왜일까요? 잘못된 선택으로 벌어질 일을 두고 스스로를 책망하기보단, 세상을 탓하며 마음 편히 분노하고 싶었던 걸지도 모릅니다.

대환장파티였던 이사는 무사히 마무리했습니다. 큰 변화가 생겼다면 앞으로는 이 집에 물건 하나 들이는 것도 모두 협의가 필요한 상황이 됐다는 거겠죠. 더이상 나 혼자만의 공간이 아니니까요. 사소한 물건들을 고를 때도 고민이 필요합니다. 둘이 머리를 맞댄 채 물티슈의 평량이 어떻고, 변기세정제의 용량은 또 어떻고... 선택에 제약이 생기고 통제하지 못하는 것들도 분명 많아질 테지만, 더 재미있는 삶이 펼쳐지리란 확신이 듭니다.

통제 불가능한 것들로 인해 괴로워질 때면 모든 선택은 패키지라는 말을 떠올립니다. 결국 나의 선택이 벌일 일로 괴로운 것일 뿐, 통제불가능한 코스믹 호러 같은 게 아니라고. 이 사실을 자각하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한결 나아지네요. ‘패키지’라는 단어의 어감 때문인지 간혹 찾아오는 괴로움도 기꺼이 감당해야 할 썸띵이라는 가벼운 마음으로 바라보게 되기까지 합니다.

‘아, 이제 열반의 초입쯤에 다다른 것 같다’라는 헛소리를 쓰려던 찰나, 스마트폰 자판에 집중하며 천천히 걷느라 눈앞에서 지하철이 떠나고 있네요. 지각 확정입니다. 이런 개 같은 일이! 10초만 일찍 나설걸. 걸음을 조금만 빠르게 할걸. 폰을 만지지 말걸. 하지만 이 또한 풀칠 레터를 보내는 보람찬 선택에 패키지로 딸려오는 고통이겠죠.

'모든 선택은 패키지’라. 제가 항상 잔잔하게 빡쳐있는 이유도 바로 이것 때문입니다. 모든 선택이 패키지라면, 선택하기 전에 그 패키지에 무엇이 포함되어 있는지가 오해의 여지 없이 투명하게 공개되어 있어야 옳게 된 세상 아닐까요? 저는 지금 다니는 회사를 고르기 전엔 이렇게 야근이 많을지는 전혀 예측하지 못했거든요.

아마도 부처님이라면 이런 불만에 ‘회사가 너를 붙잡고 있는 게 아니라 네가 회사를 붙잡고 있는 것이다.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라’라고 말하셨겠지만, 자본주의 사회의 되바라진 풀칠러인 저는 이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니가 뭘 알아.”

세상이 신이 만든 것이라면, 통제할 수 없는 문제가 생겼을 때 순응하는 게 최선이겠죠. 신에겐 감히 까불 수 없을 테니까요. 하지만 저는 인간이 만든 게 명백한 ‘사회’ 속에서 살아가고 있으니, 통제할 수 없는 무언가가 저를 골탕 먹일 때 가만히 있고 싶진 않네요.

곧 연휴네요. 우리 모두 푹 쉬면서 뭐가 잘못된 건지 숙고하고, 부조리를 직면하고, 기만에 저항하는 기백의 회복을 꾀해봅시다.

“지금 내 손에는 결과물이라고 할 만한 게 아무것도 없는데, 대체 지난 2주 간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던 이유가 뭐지?”

제 얘기를 들은 지인이 ‘나는 그래서 일기를 쓰기 시작했다’라고 하더군요. 미처 처리하지 못한 할 일이 눈에 밟혀 괴로워지더라도 일기에 적힌 내용은 그 일을 못 한 분명한 이유(=다른 일을 해야 했다)가 있다는 걸 일깨워주기 때문에. 감화된 저는 그날부로 일기를 쓰기 시작합니다. 사실 ‘놀고먹는 일상’을 기록한 일기는 오랫동안 써왔습니다. 그런데 또 무슨 일기냐고요. 이번에 새롭게 쓰기 시작한 일기에는 놀고먹는 일상 외에 저의 하루를 채우는 또 다른 한 축인 ‘일하는 일상’을 담았습니다. 저는 이제 워크와 라이프를 구별해 두 개의 일기를 쓰게 된 것입니다.

그렇게 꼬박 2개월이 흘렀습니다. 일하는 일상을 담은 일기는 총 27편이 쌓였네요. 이틀에 한 번꼴로 쓴 셈인데요. 파주 님의 이야기를 읽고 나니 그 일기들이 마치 ‘통제할 수 없는 것들이 눈코 뜰 새 없이 밀어닥치는 상황에서도 어떻게든 중심을 잡으려 노력한 흔적’으로 다가왔습니다. 나 자신의 움직임이나마 통제 가능한 영역에 둠으로써 주변으로 밀어닥치는 상황들이 적어도 ‘이쪽에서 저쪽으로 흘러간다’라고 파악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것입니다. 이사의 텀이 생긴 것은 통제 밖의 일이지만 잠시 머물 방을 선택하는 것은 그나마 통제 가능한 일인 듯 말입니다.

‘모든 선택은 패키지’라…방금까지 쓴 것으로 미뤄보면 짐작하실 수 있겠지만 저는 오히려 반대로 생각해 왔습니다. ‘모든 상황은 개별 포장. 나는 깔 수 있는 것만 깐다. 까지 못하는 포장에는 미련 두지 않고 그냥 받아들인다.’ 뭐 그런 얘기. 그런데 오늘따라 ‘모든 선택은 패키지’라는 이야기가 새삼 설득력 높게 다가오네요. 왜 그럴까요? 예전에 비해 무언가 책임질 것들이 많아진 탓일까요? 불쑥 나타난 이슈에 대응해야 하는 경우보다는 결국 다 내가 자초한 일인 경우가 더 많아진 것일까요? 혹시 이것도…나이가 들어간다는 확실한 증거일까요? 왠지 슬퍼집니다.

파주 : 곰팡이 냄새로 가득한 임시 숙소에서 시도 때도 없이 이 양반의 라이브 영상을 틀어두었습니다. (저는 이제서야 뒤늦게 입덕했는데 팬들은 후지이 카제를 ‘교주님’이라 하더군요.) 일본어 가사를 전혀 알아듣지 못하다가, 이사가 마무리될 때 즈음 해석을 찾아보곤 무릎을 쳤습니다. ‘매일이 축제이니 즐겨라’라는 다소 진부해 보일 수도 있는 내용인데요. 지금의 저에게는 붓다의 말씀만큼이나 필요한 말이었습니다.

인생은 통제(는 커녕 예상조차도) 불가능한 것들 투성이기에 아름다운 것일지니… 괜히 교주라 불리는 게 아니네요. 후지이 카제 교주님의 가르침을 따라서 매일이 축제라는 마음으로 살아가야겠습니다.

언제 또 꼴통을 부리기 시작할 지는 모르지만 일단 당분간은… 오늘도 마츠리, 마츠리입니다.

매일이 축제라면 오늘의 축제가 끝나더라도 내일의 축제로 위안 삼을 수 있겠군요.

이번 주의 남은 축제들도 즐겁고 행복하게 보내시기를.

저희는 다다음 주에 <밖에 춥다> 라는 주제로 찾아뵙겠습니다

답장 보내기

게시하기

웹에서 보기

지난 호 편지에 보내주신 답장에

다시 짧은 답장을 보내드립니다.

☞지난 호 편지 읽어보기

풀칠러A

아매오님! 이렇게 전직이라니요! 최고의 이야기꾼에서 최고의 장사꾼(?)까지 섭렵하시려는 겁니까.. 그랜드 오픈하면 살짝 알려주실거죠..??

아매오

풀칠에서 하고 싶은 이야기는 결국 밥벌이에서 나오니까요. 어떤 식이 될지는 모르겠지만...미니멀(...) 오픈도 제게는 나름 큰 사건인 만큼 풀칠러 여러분께 계속 이야기 전해드리는 한, 알리기 싫더라도 알려지게 될 것입니다. 헤헤.

여기까지 읽어주신 풀칠러님이 풀칠의 대주주이십니다.

대주주 풀칠러 님께 이번 주의 풀칠 팀 소식을 공유드립니다.

1. 풀칠의 9월을 돌아봤습니다(feat. 전어무침, 문어숙회)

어젯밤 서울 모처에서 야백, 파주, 아매오가 회동을 가졌습니다. 다시 편지를 보내기 시작한 지도 어느덧 100일이 다 돼 가는 만큼 그간의 일을 돌아보고 어떻게 하면 더 재미있고 의미있는 풀칠을 만들 수 있을지 논의했어요. 앞으로도 종종 이런 자리를 마련해보려고 합니다. 가만 있자, 여러분의 9월은 어떠셨나요?

☞ 풀칠 9월 회고 보러가기

2. 기나긴 추석 연휴를 맞아 한 주 쉬고 오겠습니다

작년 이맘때부터 많은 분이 기다렸던 바로 그 추석 연휴가 이번 주로 다가왔습니다. '뭐 한 것도 없는데 올해도 벌써 3/4이나 지나갔네' 싶다가도, '모르겠고 일단 쉬자!'라며 두근두근 설레는 걸 반복하고 있네요. 풀칠도 한 주 쉬고 10/15 (수)에 돌아오겠습니다. 풀칠러 여러분 모두 즐거운 명절 보내시길!

3. 풀칠하는 데 쓰겠습니다

아래 계좌로 풀칠팀에게 팁을 보내주실 수 있습니다. 보내주신 팁은 메일 발송 솔루션 비용에 사용됩니다. 풀칠러님의 뜨끈한 마음이 풀칠을 더 차지게 만듭니다.

카카오뱅크 3333-20-3881365(이*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