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금주의 에세이 당번 파주입니다. 요즘 참 시간이 쏜 화살 같다는 생각을 합니다. 부모님이 말씀하셨던 그 순간("너도 늙어봐라, 한 달이 꼭 한 주 같다")이 저에게도 닥친 걸까요? 어영부영하다 보니 벌써 4분기에 접어들었네요. 시간이 흘러가는 게 점점 두려워만집니다. 이번 레터에는 빠르게 흘러가는 시간에 대해 고민해 보았습니다. 저는 요즘 하루가 20시간처럼, 일주일이 꼭 5일인 것처럼 느껴지는 삶을 살고 있습니다. 아마도 인상적인 순간이 많지 않아서겠죠. 모쪼록 풀칠러 여러분은 많은 것들이 기억에 남는 하루를 보내시기를, 진심으로 바라겠습니다. 오늘도 읽어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 확실히 나이가 든 모양이다. 어느 분기점을 지나면 시간이 곱절은 더 빠르게 흐른다던데. 나도 모르는 새에 그 지점을 지났는지 요즘 들어 시간이 무지막지한 속도로 내달리는 게 체감된다. 며칠 전에는 올해가 100일도 남지 않았다는 말을 듣곤 소스라치게 놀랐다. 매년 마찬가지기는 했다만 올해는 정말이지 뭐 하나 제대로 이뤄낸 게 없는데. 서랍 깊숙한 곳에 묵혀둔 다이어리를 뒤적였다. 이내 올해 1월에 호기롭게 적었던 포부를 찾았다. 빼곡하게 적힌 캘린더를 보자마자 괜히 펼쳤다는 후회가 들었다. 만다라트 표까지 작성해 가면서 해내야 할 것들을 긴 목록으로 작성해 두었는데, 그중에서 제대로 해낸 게 단 하나도 없어서다. 어제까지의 나를 두고 혀를 차며 한심해 하는 사이 일주일이 또 금방 지나갔다. 이제 올해 남은 시간은 겨우 93일이었다. 하루가, 한 주가, 또 한 달이 지나가는 속도가 두려웠다. 그 정도가 얼마나 심했는지 어느 날은 구글에 '시간이 빠르게 가는 이유'를 검색하기도 했다. 시간의 가속을 체감하는 게 나뿐만은 아닌지 검색된 자료의 수가 상당했고 첫 줄에 걸린 '소소한 건강 상식' 기사를 클릭했다. 기사에서는 나이가 들수록 시간이 빨리 가는 원인을 이렇게 설명했다. 사람이 늙어가면서 몸에서 분비되는 도파민의 양이 줄어든다고. 그러면 뇌 안에서 일하는 신경세포들의 정보 처리 속도가 느려진다 거다. 몸의 속도가 느려지니 상대적으로 외부의 시간을 빠르게 느낀다는 세세한 설명으로 가득했지만 우둔한 나는 그 설명을 온전히 이해하지는 못했다. 머리를 긁적이며 스크롤을 아래로 굴렸다. 시간이 제멋대로 내달린다고 느끼는 건 비단 세포의 문제만은 아니라고 했다. 당연히 물리학적인 시각에서 보면 시간의 흐름이 다를 리가 없겠지만, 심리학적으로 접근하면 시간이 빨리 간다는 말이 사실이라고. 특히나 사람들이 실제로 세월의 가속을 체감하는 결정적인 이유는 '인상적으로 기억하는 순간이 어릴 때만큼 많지 않아서'라고 하는데... 아마 오래 살아가면서 이미 경험해 본 것들이 많아졌을 거고, 그러다 보니 행복의 역치 값이 커지는 탓에 생기는 필연적인 일일 테지. 반대로 말하면 인상적인 기억이 풍성할수록 시간이 더디게 간다고 느낄 수 있는 걸까. 속절없이 떠나는 시간을 어떻게든 붙잡고 싶어 최근 인상적인 기억을 더듬어 보았다. 연초에 하려던 계획이 일찍이 망하긴 했지만 분명 다사다난한 한 해였는데 극적으로 행복했던 순간도, 충격적이라 말할 수 있는 기억도 단번에 떠오르지 않았다. 시국이 시국이니 만큼 회사와 집만 오갔던 게 문제였을까. 분명 집에서 소소하게 즐거움을 누리거나 회사에서 작은 성취감을 느낀 적도 적지 않았는데. 감히 행복이라는 수식어를 붙일 만한 일을 떠올리려 하니 괜스레 뒷골이 아려왔다. 여행을 떠나고 페스티벌에 갔던 몇 해 전 가을까지 기억을 거슬러 올라가야 했다. 예전에는 어땠을까. 명함 주는 방법도, 전화받는 것도 서툴렀던 1년 차. 계획없이 이직을 감행해 커리어가 된통 꼬여버린 것만 같았던 2년 차 때는. 분명 불안감에 떨긴 했지만 재미가 없지도, 행복에 무감하지도 않았는데. 그때와 지금과 다른 점이 있다면 당시에는 업무로부터 도망칠 숨구멍을 요령껏 잘 만들어두었던 것이다. 회사에서 맡은 일을 그르치곤 '망했다'는 말이 절로 터져나왔을 때도, 심각하게 좆됐음을 감지했을 때도 감정적으로 빠져나올 수 있는 세이브포인트를. 이를테면 내게는 엽떡(반드시 오리지널맛에 베이컨을 추가해야 한다)이나 마라탕, 홈런볼 같은 것들이 일종의 세이브포인트였다. 먹을 것뿐만 아니라 좋아하는 가수의 라이브 영상이나 흠모하는 작가에게서 받은 사인도 종종 나의 체력을 회복시키는 포켓몬 센터의 역할을 해냈다. 돌이키기에는 너무 늦었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도 내가 향한 세이브포인트는 제법 잘 작동했고, 덕분에 지금까지 휘청거리면서도 잘 걸어왔다. 세이브포인트라는 거창한 네이밍이 민망할 정도로 지극히 소소한 일들이지만 그렇기에 힘든 순간마다 쉽게 드나들 수 있었다. 상사에게 된통 깨진 날이나 나의 무능력에 실망하고 터덜거리며 돌아온 날에도 호쾌한 '배달의 민족 주문!' 하나면, 신경 써서 재생한 음악 한 곡이면 다시금 정신력을 회복했다. 최근에 시간이 멋대로 빠르게 지나가는 것도, 요즘 들어 쉽게 긴장하고 심장이 자주 요동치는 것도 모두 세이브포인트를 제대로 마련하지 않아서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수가 이야기했던 것처럼 직장인에게는 다른 무엇보다 '회복력'이 관건이니까. 딱딱해져 가는 뇌가 지금 당장 세이브포인트를 업데이트할 필요가 있다고, 나의 썩은 몸에게 언질을 주는 것 같았다. 올해가 아직 93일 남았다. 텅 비어있는 10월 캘린더 페이지를 펼쳤다. 아주 소박하지만 제 몫을 톡톡히 해내는 세이브포인트를 딱 5개만 마련하는 것으로 올해의 목표를 변경했다. 작은 다짐을 했을 뿐인데 벌써 시간의 발목을 부여잡은 기분이 든다. 아매오 : 이동진 평론가의 책이었던 것 같습니다. 삶을 이루는 상당수는 사실 습관이고, 그렇기 때문에 습관이 행복한 사람이 행복한 것라는 문장을 발견한 곳은. 든든하죠? 늦은 시간 울리는 '배달의 민족 주문!'이라는 알림이 건강에는 적신호였을지 몰라도 파주 님의 행복에는 신경써서 재생한 음악만큼 밝은 파란불이었다는 얘기니까요. 저는 타인과의 관계에서 형성된 습관을 소중하게 여깁니다. 대화를 나누거나, 밥을 먹거나, 길을 걷는 등 지극히 일상적인 순간들에 내가 아닌 누군가 들어와 살았다는 흔적이니까요. 소중한 시간이 있었고, 그 시간을 만들어준 누군가 있었다는 것. 저의 세이브포인트는 그런 것들이에요. 그러니까…말하자면 추억팔이? 사람을 소설책에 비유하면 장편집보단 단편집에 가까운 듯합니다. 서로 다른 갈피에 살고 있는 사람들을 따라 내 삶의 책장은 넘어가죠. 마지막 단편이 끝났을 때 비로소 한 권의 책, 한 사람의 인생이 완성되는 겁니다. 습관은 책 곳곳에 그어둔 밑줄과 끄적여 놓은 메모 같은 거 아닐까 싶네요. 마치 언제든 찾아갈 수 있는 세이브포인트처럼. 마감도비 : 만다라트,, 만트라..? 계획과는 거리가 먼 인간이라 '만다라트 표'가 무엇인지 검색까지 하고 돌아온 1인입니다. 계획이라고는 도무지 세울 줄 모르는 저에게 1월에 적었던 포부를 다시 꺼낼 수 있다는 것 자체가 대단한 능력처럼 느껴집니다. 저에게도 요즘 파주님이 말씀하신 '세이브포인트'가 절실해지는 거 같아요. 이룬 것도 없는데 나이만 먹었다고 느낄 때, 업무를 맡아도 노하우가 쌓이진 않고 자꾸 힘에 부치기만 할 때, 하루를 모두 소진하고 집에 돌아왔는데 마음이 너무나 허전할 때. 나를 '지금'이라는 시간에 정박시킬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자주 합니다. 파주님 덕분에 그때 저에게 필요한 게 바로 '세이브포인트'라는 걸 알게 되었네요. 그래도 불행 중 다행이 있다면 몇 안 되는 '세이브포인트'의 옥석을 가릴 수 있게 됐다는 겁니다. 퇴근 후 혼자 마시는 차가운 맥주 한 잔도, 잠을 줄여가며 보는 넷플릭스 드라마도, 블루투스 스피커를 통해 듣는 음악 감상도 좋지만. 역시 가장 좋은 세이브포인트는 사람이더라구요. 저는 파주님이 올해를 다른 관점에서 바라보면 어떨까 싶습니다. 제가 보기에 파주님는 누군가에게 빼곡한 세이브포인트가 되어준 사람이니까요. 엽떡, 마라탕, 홈런볼이 저에게 세이브포인트였던 걸 보면 말입니다. 저는 누군가에게 세이브포인트를 빚지고 있는 걸지도 모르겠네요. 올해 남은 93일, 저도 채무 이행을 위해서 분발해야겠습니다. 야망백수 : ‘세이브포인트’란 무엇인가. 유년시절을 게임중독으로 보낸 제가 감히 한번 설명해 보겠습니다. 파주님은 세이브포인트를 '회복시켜주는 곳'으로 생각하시는 것 같지만 그건 절반만 맞는 답이에요. 세이브포인트의 핵심 속성은 '불가역적 갱신'이거든요. 세이브포인트를 넘고 나면 아무리 죽어도 세이브포인트 이전으로 튕겨나가진 않잖아요. 시간의 속도에 멀미도 하고 같은 곳을 맴돌다 절망에 빠지기도 하는 것. 그러면서도 어떻게든 경험치를 쌓고 쌓아 결국엔 이전으로 돌아갈래야 돌아갈 수 없는 어떤 지점을 만들어내는 것. 저는 이게 '세이브포인트'라고 생각해요. 파주님이 지금 시간이 빠르게 지나간다고 느끼시는 건, 세이브포인트를 만드느라 초집중 상태라서 그런 건 아닐까 한번 주제넘은 진단을 해봅니다. 게임에 집중하면 시간 엄청 빨리 가잖아요. 노화는 모두에게 공평하다지만 모두가 똑같은 개수의 세이브포인트를 만드는 건 아니죠. 누군가의 진짜 삶의 길이는 세이브포인트의 개수로 파악해야만 하지 않을까요? 그런 의미에서 파주님은 늙어가고 있는 게 맞긴 하지만... 꽤 잘 늙어가고 있는 거란 위로를 전하고 싶네요. -풀칠 멤버 중 유일한 20대로부터- by.야망백수 ▲ 누운 자리에서 오징어 게임 순삭했읍니다. 오늘 저희가 보내드린 이야기들, 어떠셨나요? 저희는 여러분의 이야기도 궁금해요. 일하면서 겪은 일, 늘상 끌어안고 있는 고민, 오늘 편지에 대한 피드백 무엇이든 좋답니다. 아래 버튼을 눌러 여러분의 풀칠하는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어이 거기 풀칠 멤바들! 자네들 혹시 이거 좋아하나...? 이번 주도 분골쇄신 🌾풀칠🌾 만드느라 고생한 야망백수, 아매오, 파주, 마감도비에게 김밥 한 줄 쏘고 싶으시다면 아래 버튼으로 후원해주세요🍚 풀칠러님의 따뜻한 응원은 저희가 계속 쓰는 데 큰 힘이 됩니다☺ |
밥벌이 에세이 레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