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풀칠러 여러분. 금주의 에세이 당번 파주입니다. 한 주간 잘 지내셨나요? 남들보다 늘 한 템포 느린 저는 이제서야 새해 목표를 정리했습니다. 운동하기, 영어 공부하기, 설거지 미루지 않기... 올해에도 역시나 만만치 않은 TO DO 리스트로 다이어리를 채웠는데요. 그중에서 가장 첫 번째에 써둔 저의 목표는 ‘엄마 아빠와 곱창 먹으러 가기’입니다. 풀칠러님은 어떤 새해 목표를 세우셨나요? <안내> 이번 주 풀칠툰은 야망백수의 아이패드 고장으로 쉬어갑니다. (야망백수 : 하...예상치 못한 지출의 맛이란...독하군요...) 나른한 주말 오후 단골 카페에 반쯤 누운 채 때늦은 연말 회고를 시도했다. 인스타그램 피드를 보아하니 다들 스스로에게 ‘참 잘했어요’ 도장을 찍어주던데, 가만히 있으려니 괜히 뒤쳐지는 마음이 들어서다. 너덜해진 다이어리를 꺼내 작년 이맘때쯤 적어둔 것들을 체크해 나갔다. 주 3회 러닝(X), 아침 명상(X), 매일 다섯 줄 쓰기(X)... 죄다 깔끔하게 실패해버린 탓에 다이어리가 꼭 수학시험지 마냥 X표투성이였다. 기분만 울적해지는 To Do 리스트 점검은 미뤄두고 대신 갓 뜯은 2022년 다이어리에 이렇게 적었다. 2021년 행복했던 일. 다사다난한 한 해였는데 그럴듯한 단어 하나를 써내지 못했다. 애꿎게 머리만 쥐어뜯다가 스마트폰 속 사진을 뒤적였다. 갤러리에는 떡볶이와 곱창전골 같은 배달 리뷰용 사진들이 줄지어 등장했다. 그래, 일상이 박살나던 순간에도 야식만큼은 꾸역꾸역 잘 챙겨먹었지. 엄지손가락을 마저 움직이자 이내 내가 찾던 사진이 나왔다. 마스크 밖으로 기쁨이 흘러넘치는 부모님의 얼굴. 2021년에 내가 가장 행복했던 순간은 분명 부모님과 함께 갔던 부산여행이었다. 갑작스레 부산을 향한 건 사실 호텔 바우처 때문이었다. 인심 좋은 선배로부터 받은 호텔 바우처는 사용기한이 그리 넉넉지 않았고, 나는 당장 인숙에게 전화를 걸어 거의 일방적으로 여행 날짜를 잡았다. 용돈을 받을 때마다 빈말처럼 내뱉었던 효도여행은 그렇게 어영부영 시작됐다. 부모님은 꼭 소풍을 앞둔 소년소녀처럼 굴었다. 오전 10시 출발하는 기차를 8시로 앞당기라고 닦달했고 그 바람에 우리는 점심이 채 되기도 전에 부산역에 도착하고 말았다. 정표는 역에 내리자마자 흡연구역을 찾아 사라졌다. 서로를 찾아다니며 길이 두어 번 엇갈리는 동안 인숙은 30년 전 부산여행을 회상했다. “저 양반, 예전에 왔을 때도 꼭 저랬어. 그래서 엄마가 어떻게 했느냐면...” 그날 화가 잔뜩 났다는 인숙은 정표를 떼어 놓곤 혼자서 해운대를 향했다고 했다. 뒤늦게 쫓아온 정표와 대판 싸웠다는 이야기까지 꼼꼼하게 덧붙였다. 그간 내가 알지 못했던 에피소드를 듣고 있자니 꼭 두 사람의 타임루프 드라마를 엿보는 것 같았다. 해운대에 다다른 우리는 체크인까지 시간을 때우기 위해 해안가를 산책해야 했다.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데도 인숙의 표정은 더없이 밝았다. 동백섬을 향하던 길에서 인숙은 갑자기 추억보따리를 풀기 시작했다. “예전에 해운대 왔을 때 말이야. 화장실에서 너네 누나 발 닦아주다가 청소하시는 분한테 왕창 깨졌거든. 왜 모래를 여기서 닦느냐고. 그때 그 화장실이 저긴 거 같다야. 근데 있잖냐, 세 살 짜리 애기가 제 발이 까끌거린다고 엉엉 우는데 어쩌겠어. 누나도 기억하려나 모르겠네.” 그건 30년 전, 그러니까 인숙이 딱 내 나이만큼 젊었던 날의 이야기였다. 저녁엔 지인에게 추천받은 곱창집으로 향했다. 배도 고프지 않다던 인숙과 정표는 연탄불 위에 놓인 곱창과 대창을 순식간에 먹어 해치웠다. 몹시 당황스러웠다. 지금껏 부모님이 곱창 같은 건 좋아하지 않는다고 알고 있었으니까. 이왕 호텔에 가까운 맛집이 있으니 가보자며 미안함을 안고 온 참이었다. “엄마도 곱창 좋아해?” 잘 익은 곱창을 상추에 싸서 복스럽게 먹던 인숙은 핀잔을 주었다. 여태껏 그것도 몰랐냐면서. 엄마도 곱창을 좋아하는구나. 삼십 년 만에 알게 된 인숙의 취향이었다. 우리는 곱창전골을 마저 비우고 그 안에 밥까지 넉넉하게 볶아먹었다. 나는 부모님을 몰라도 너무 몰랐다. 이튿날 이른 시간부터 조식을 챙겨먹은 우리는 체크아웃 시간을 꽉 채워가며 호캉스를 즐겼다. 인숙이 바다가 내다보이는 야외 스파에서 몸을 녹이는 동안 정표와 나는 테라스에 앉아 맥주를 한 캔씩 비웠다. 인숙을 향해 손 흔드는 여유도 잊지 않았다. 제대로 된 호캉스는 처음이면서 우리는 누구보다도 능숙하게 호캉스를 누렸다. 시간이 더디게 흐르던 이 여행이 무척 근사하게 느껴졌다. 짧은 여행을 마치고 인숙과 정표는 대전으로, 나는 곧 홀로 서울행 기차에 몸을 실었다. 서울에 도착하자 주머니에서 진동이 울렸다. 인숙은 집에는 잘 도착했느냐며 나이 든 사람들 데리고 다니느라 고생했다고, 고맙다고 말했다. 순간 목이 턱 막히는 바람에 제대로 된 인사도 못한 채 통화가 끝났다. 그러고 보니 아직도 대답하지 못했다. 나도 엄마 아빠와 함께 다녀서 무척이나 좋았다고. 나한테도 그 여행이 내 생애 최고의 날 중 하나였다고. 다이어리를 펼쳐 올해 부모님과 하고 싶은 TO DO 리스트를 잔뜩 적었다. 경주로 호캉스 가기. 함께 있는 사진 자주 찍어두기. 엄마 아빠가 좋아하는 음식 발견하기. 사랑한다고 말하기. 더 이상 부모님과의 시간을 유예하지 않기. 촌스럽기는 해도 꽤 근사한 목표라는 확신이 들었다. 아매오 : 취업 후 처음 다녀온 가족 여행이 떠오릅니다. 여행지에 갈 때는 아버지가 운전을 하셨어요. 어머니는 조수석에 타셨고요. 뒷자리엔 저와 동생이 있었죠. 돌아오는 길엔 저와 동생이 번갈아 가며 운전을 했습니다. 부모님은 뒷자리에 앉아 주무셨고요. 저는 그 여행이 우리 가족에게 어떤 반환점이 되어준 것처럼 느껴지더라고요. (지인의 표현을 빌리자면) 여행이 여행이 아닌 효도로 느껴지는 건 좀 슬픈 일입니다. 그 자체로 슬프기도 하지만, 반대편을 생각해 보게 되거든요. 어린 저와 동생을 데리고 여행 다니던 부모님은 어떤 마음이었을까요? 그 여행들은 모두 육아의 일환이었을까요? 물음에 대한 답을 이미 알고 있기에 더욱더 씁쓸하네요. 휴. 제가 잘해야지요. 야망백수 :
멋진 효도여행을 다녀오셨군요. 부모님을 모시고 다녀오는 여행, 소위 ‘효도여행’이란 무엇일까요? 저는 부모 자식 관계의 전환점을 기념하는 선언이라고 생각합니다. 나는 성체다! 오늘부로 당신들은 은퇴다! 무엇으로부터? 나로부터! 이제부턴 내가 당신들의 세계를 넓혀주겠다! 엄마 이게 호캉스야! 저도 작년에 부모님에게 여행 갈 생각 있냐고 말을 꺼내봤었는데요. 단칼에 반려 당했습니다. 호텔도, 맛집도, 심지어 행선지도 정하지 않고 말부터 꺼냈으니 그럴만 하긴 했지만요, 사실 진짜 이유는 다른 데 있었던 것 같습니다. 여행 얘기를 꺼냈을 때 전 '백수어게인' 상태였거든요. "너 자리 잡을 궁리나 하지 뭔 여행이냐"는 핀잔을 들으니 깨닫게 되더라고요. ‘자립’이라는 전제조건을 완수하지 않은 상태에서 ‘효도여행’이란 선언을 외쳐봤자 그냥 공염불에 불과하다는걸. 아니 근데 그놈의 자립은 왜 이렇게 요원하게만 느껴지는 걸까요. 자립 말고도 다른 목표를 놓지 못한 탓일까요. 이제 그만 자립만을 위해 살긴 싫다는 똥고집을 꺾어야 하는 걸까요. 더 이상 빚을 늘릴 순 없다는 마음으로 발버둥 치고 있긴 하지만 세월과 함께 불어나는 이자는 어떻게 해야 하는 건지. 정작 채권자는 가만히 있는데 왜 시간이란 놈이 나서서 난리인 건지. 쩝. 올해는 효도여행이라는 채무상환 선언, 제대로 한번 해보고 싶어요. 선결조건을 제대로 갖춰서요. 마감도비 : 좋은 의미로 한편의 일본영화 같은 글이네요. 큰 갈등 없이 등장인물들이 함께 시간을 보내며 서로를 좀 더 이해할 수 있게 된다는 점에서요. 가상의 이야기가 아니라 실화라서 독자로서 함께 기쁘네요. 취업을 하고 월급을 벌고 난 뒤부터는 명절이나 생신이 되면 부모님께 무엇을 해드려야 하나 항상 고민했던 거 같아요. ‘건강기능식품은 너무 뻔한가’ ‘돈다발은 작년에도 했는데’, ‘이건 사놔도 잘 먹지도 않던데...’ 따위의 생각을 하며 머리를 싸맸죠. 최근에 한번은 몸에 좋다는 건강식을 본가에 내려보냈는데 사실 요즘 위가 좋지 않아 한동안은 먹기 힘들겠다는 말을 들었죠. 부모님은 고맙다고 하셨지만 수화기 너머 빨개진 얼굴로 잔뜩 짜증을 냈던 기억이 나네요. 부끄러움은 제 몫이겠죠. 어쩌면 경제적으로 자립을 하고 나서 좋은 점으로 부모님을 좀 더 이해할 수 있게 됐다는 걸 꼽을 수도 있겠네요. 아무리 지금과 세태가 달랐다고 해도 일은 고되고 사람은 어렵죠. 그들의 노고가 나를 키운 거라면 나의 노고도 어디론가로 향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요. 파주님, 그 호텔 저도 알려주세요. BY.파주 <풀칠>이 고른 노동요, '풀레이리스트' 코너에 오늘 소개할 곡은 박소은의 고강동(2020)입니다. 미국 컨트리 음악을 연상시키는 전주 뒤에 호기로운 가사가 흘러나옵니다. “나는 아주아주 돈을 많이 벌어서 고강동을 통째로 다 사버릴 거야.” 노래가 클라이막스로 향해갈수록 야망은 더 구체화됩니다. 아주아주 많이 유명해져서 엄마한테 백화점을 줘버릴 거라고, 거기에 있는 에스컬레이터까지 엄마 거라고요. 세상에, 이것보다 파격적인 효도가 있을까요. 제가 아주아주 돈을 많이 벌게 된다면 부모님께 무엇을 해드릴지 고민해 봤습니다. 마음 같아선 저도 엄마 아빠가 사는 가양동을 통째로 다 사드리고 싶지만요. 로또에 당첨된다 해도 집 한 채 해드리기 어려운 게 현실입니다. 그래서일까요. 유쾌한 노랫말과 달리 <고강동>은 어쩐지 구슬픈 정서가 흐릅니다. 직장인으로 밥벌이를 하면서 누군가에게 정성을 쏟는다는 게 점점 벅차게 느껴질 때면 <고강동> 속 귀여운 허풍에 다시금 귀를 기울여봅니다. ‘결국 사랑은 시간을 선물하는 일’이라는 말도 함께 떠올리면서요. 우리가 꿈꾸는 모든 걸 해드릴 순 없지만요. 일단 할 수 있는 것부터 해야겠습니다. 내일 아침에는 부모님께 전화 한 통씩 드려고요. 언제나 그랬듯 별말 하진 않겠지만요. 💬풀칠러A 야망백수님 그림 실력이 매 레터마다 일취월장이라 놀라워요. 부디 계속 해주세요!
마감도비, 아매오, 야망백수, 파주님 그리고 저... 우리 모두 올해도 화이팅입니다.💬 야망백수 헉. 봐주셔서 고맙습니다 풀칠러님. 메일을 보낼 때마다 '누가 보긴 할까, 이게 과연 누군가에게 보낼 만한 내용일까'하는 마음에 고통스러운데요. 계속 해달라는 말씀이 너무나 큰 힘이 되네요. 저희가 가장 듣고 싶은 한 마디를 들려주셨어요...! 복받으실 거에요. 저희도 풀칠러님의 일상 어느 순간에 가닿을 수 있는 따뜻한 이야기 들려드릴 수 있도록 매주 최선을 쏟아보겠습니다요. 2022년에도 풀칠 한번 잘 해봐요 우리! (어...근데...응원이 무색하게...오늘 펑크를 내고 말았네요...이거...송구합니다...아이패드 고쳐서 돌아오겠습니다.) 저희는 여러분의 이야기도 궁금해요. 일하면서 겪은 일, 늘상 끌어안고 있는 고민, 오늘 편지에 대한 피드백 무엇이든 좋답니다. 아래 버튼을 눌러 여러분의 풀칠하는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풀칠하는 데 쓰겠습니다 아래 계좌로 풀칠팀에게 팁을 보내주실 수 있어요. 풀칠러님의 뜨끈한 마음이 <풀칠>을 더 차지게 만듭니다. 카카오뱅크 3333-20-3881365 (풀칠) 💎후원해주신 금액은 전액 서비스 운영(메일 발송 솔루션 비용 등)에 사용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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