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ULL CHILL’ 특집입니다. 안녕하세요. 아매오입니다. 대문이 산뜻하지 않나요? 봄은 아니지만, 뭐. 에세이 담당 한 바퀴 돌고 나서 보니까 너무 울적한 얘기만 한 것 같더라고요. 이번 장마처럼 말이죠. 그래서 이번엔 ‘FULL CHILL’ 특집입니다. 그게 뭐냐고요? 설명드리지죠. 풀칠의 기치는 ‘푸념의 규모를 키우자’입니다. 그 다음엔? 우리 모두가 FULL-CHILL하자는 거죠. 없는 단어긴 하지만 대충 몹시 만족스런 상태를 뜻합니다. FULL(ㅈㄴ) + CHILL(편-안). 느낌 오죠? 오늘은 저희 네 명이 각자의 FULL CHILL법을 소개합니다. 별 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되는 것들입니다. 따뜻한 롤빵처럼. 여러분은 어떤가요. 틈틈이 FULL CHILL 좀 하고 계시나요? 배운게 도둑질이라서요 / 파주 새 직장에서 뉴페이스로 며칠간 눈도장을 찍고 나면 질문 세례를 받게 된다. 십여 년 동안 회사에 자부심을 차곡차곡 쌓아온 임원은 네놈이 어떤 것을 잘하느냐 물어오고 옆 팀 팀장님은 도대체 무슨 잘못을 저질러서 이 바닥에 발을 붙이게 되었느냐고 위로 섞인 말을 건넨다. 그 물음표를 뚝딱거리며 넘기고 나면 이내 질문의 턴이 이쪽으로 넘어오는데, 이게 또 고역이다. 사원급의 연봉 인상률부터 최근 3년간 인센티브는 어떠했는지, 내 자리에 앉아 있던 전임자는 무슨 사연 때문에 이 자리를 박차고 나간 것인지 등등 회사에 대해 궁금한 거야 많지만, 냅다 ‘잡플래닛에 나온 그 그지깽깽이 같은 윗대가리가 혹시 본인을 지칭하는 게 맞나요?’라고 확인할 수는 없으니 매번 적당한 질문을 골라 의뭉스럽게 순서를 넘기곤 한다.
“이 일이 너무 어려워 보여요. 어떻게 하면 잘할 수 있을까요?” 엄살 1스푼과 동경(하는 듯한 뉘앙스) 5스푼, 일을 잘하고 싶다는 욕망(의 가면) 6바가지를 뒤섞은 질문을 하면 대부분은 몇 분에 걸쳐 진심 어린 조언을 던져주곤 한다. 그러는 동안 나는 감동했다는 얼굴을 한 채 가끔 고개를 끄덕거리면서 듣고 있다는 제스처만 성실하게 취하면 됐다. 딱 한 번, 일의 요령이 알고 싶다는 풋내기의 물음에 (본인이 키우는 고양이를 똑닮은) 한 과장님은 몹시 건조한 답을 내놨다.
“지금 하는 일이 자격증이 필요한 일도 아니니까요. 배운 게 도둑질이라고, 우리가 할 수 있는 게 이런 거니까 그냥 해야죠." 시니컬한 대답이었지만 은근한 자부심 같은 게 비쳤다. 인류에게 이바지하는 백신을 개발하는 거나 그 기업의 주가를 예측해 돈을 왕창 버는 것을 능력으로 가지지는 못했지만, 결국 우리가 잘할 수 있는 걸 하고 있다는 믿음이 어렴풋이 느껴졌다고 할까. 밥을 잘 먹는 것도 업이 되는 복잡다단한 세상에서 고작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글을 다듬고 짱구를 열나게 굴려가며 나무에게 미안하지 않은 책을 만들어내고 뒷바라지하는 것뿐. 결국, 배운 게 도둑질이라 그저 하는 수밖에. 그나마 배워놓은 도둑질이 밉지 않아 다행이다. 어쩐지 출근하는 발걸음에 힘이 실린다. 귀한 매물인 거 아시죠? / 마감도비 요즘 서울 원룸 전세를 알아보고 있다. 쉽지 않다. 매일 같이 직방을 헤매다보면 일종의 기시감도 든다. 읽는 이를 설득하겠다는 의지는 없이 양으로 승부하겠다는 설명 문구 속에서 발견할 수 있는 멘트. ‘OO한 OO은 귀한 매물인 거 아시죠?’ 아뇨. 모르겠는데요. 사진으로 사기 치지 말고 연락이나 받으시죠 라는 마음가짐으로 공인중개사 사무소로 전화를 걸면서도 한편으론 저 문구가 머릿속 어딘가를 부유한다. 귀한 매물.. 귀한 매물.. 이직 후 새로 옮긴 곳이 업계에서 일종의 사관학교로 불리고 있다는 걸 알게 되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회식이며 거래처와의 (술을 곁들인) 점심 미팅이며 내 전임자들에 대한 얘기가 나오지 않는 법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쯤 되면 공공연한 비밀 축에도 끼지 못할 거 같았다. "마감도비씨 전임자는 지금 OO에서 일하고 있어. 알지? 잘하고 있으려나?" 내가 알 바냐? 안다고 하기도 뭣하고 모른다고 하기도 뭣한 질문들, 빨리 도망을 가라는 것인지 그때까지 도망가지 말고 잘 버텨보라는 것인지 모를 능글맞은 웃음들 앞에서 속으로 ‘뭐야? 어쩌라는 거야’를 연발했었다. 들어온 지 두 달도 안 된 사람 앞에서 그런 말들을 서슴지 않고 하는 걸 보며 조금 질려버렸지만 요즘은 그러려니 한다. 그 덕에 나는 이제 내 전임자부터 시작해 전전임자, 전전전임자들이 어디서 무얼 하고 있는지 모두 알게 됐으니까. 다들 괜찮은 자리에서 현역으로 뛰고 있다는 게 위안 아닌 위안이다. 이직으로 얻을 수 있는 효과에 대한 기대가 있었다. 평생직장을 바란 건 아니었지만 조직에 대한 일말의 소속감이나 장기적인 관점에서 바라보는 업무·업계에 대한 이해와 노하우를 얻을 수 있기를 바랐다. ‘자리를 잡는다’는 개념과 함께 현재에 집중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미래를 위해 현재를 담보하지 않아도 되는 직장이란 이젠 우리에게 없는지도 모른다. 이러한 상황은 본인의 능력치와 자신감, 타이밍에 따라 행운이 될 수도 불행이 될 수도 있을 테고. 그래서 오늘도 버틴다. 머릿속으로는 끊임없이 상상하면서 말이다. 저 귀한 매물인 거 아시죠? 라고 말할 날을. 월터는 아니지만 때때로 상상은 현실이 된다 / 아매오 이모는 무당이다. 내가 고등학교를 다니던 시절에 신내림을 받았다. 엄마가 처음 물어본 건 공부깨나 했던 첫째 아들의 입시 결과였다. 이모는 안전하게 정배로 갔다. 수능 폭망. 하지만 언니는 한 마디를 덧붙였다. “들어간 대학에서 졸업장은 안 보인다.” 편입? 반수? 졸업도 전에 창업해서 대박? 글쎄. 일단 무당도 가까운 핏줄에겐 있는 그대로 말 못 한다는 사실은 확실하다. 무당 역시 자기계발을 한다. 신점의 한계를 보완하기 위해 명리학을 공부한다. 뭐가 다르다고 하는데, 내 눈엔 그게 그거다. 어쨌든 융복합이 대세다. 얼마 전에 만난 이모가 사주를 봐준다길래 생년월일시를 말했다. 스마트폰에 뭘 톡톡 치더니(요샌 사주도 앱으로 보더라. 놀이용 말고 실전용.) 복잡한 화면이 뜬다. 나는 봐도 모르겠다. “딴 건 됐고 올해 연애운이나 봐주세요.”
연애운 결과는 프라이버시다. 궁금하면 갠톡. 이모는 구체적으로 이렇다 저렇다 얘기해줬는데, 애석하게도 어느 정도 맞아 들어가고 있다. 아니다. 애석하지 않다. 사실 이런 이야기에 별 관심 없는 편이다. 주어진 하루하루를 잘 사는 데 열심인 스타일. 다만 틈틈이 미래를 상상한다. 꽤 상세하게. 이런 거다. 우린 보통 과거의 선택에 대해 ‘그때 다른 선택을 했으면 어땠을까?’라고 상상한다. 난 그 시점을 미래에 둔다. 사건을 먼저 만들고 그 안에서 이 선택과 저 선택을 비교한다. 어떻게 보면 과거의 일을 곱씹는 것보다 비생산적이다. 그런데 가끔 상상은 현실이 된다. 상상이 목표가 되고, 목표는 계획이 되고, 계획을 클리어하다 보면 어느새 현실인 거다. 물론 한 대 처맞으면 다시 리셋. 그래서 상상은 멈출 틈이 없다. 그 안에서 나는 일잘러인데다 건강한 정신이 깃든 건강한 신체를 가졌고 사람들과 즐겁게 지내는 한편 아름답게 연애하는 멋진 인간이다(연애운 따위 내겐 아무 영향도 못 준다). 그야말로 ‘Full(ㅈㄴ)+Chil(편-안)’. 근데 누구나 그렇지 않나? 상상으로 만든 도피처, 나만 갖고 있는 거 아니지 않나? 점이나 사주
보는 것도 다 비슷한 거 아닌가?
카이사르의 자존감수업/ 야망백수 풀칠러 A 수요일 밤, 비 오는 소리를 들으며 야망백수 님의 글을 읽는 데 몇 주 전 겪은 사건으로 마음에 묵혀두었던 감정들이 스멀스멀 올라오네요. 저는 오랫동안 꿈에 그리던 직장에서 첫 사회생활을 하게 되었고, 가득 품고 있던 야망과 열정이 무색하게도 사회의 혹독함을 심하게 뚜드려 맞으며 9개월을 지내왔습니다. 그 9개월간 책을 마감한 후 느끼는 뿌듯함 하나로 그래도 잘 참고 견뎠는데요. 얼마 전 사건이 터졌습니다.약 두 달 간 갖은 고생을 다 하며 유독 힘들었던 책 한 권을 만들었는데요. 서점에 배본된 지 하루도 채 되지 않아 댓글 하나가 달렸어요. '표절 아님? ㅎ' 그러곤 링크도 첨부했더라고요. 눌러보니, 아니 책 표지랑 똑같은 디자인이 떡하니 걸려 있는 게 아니겠어요. 설마 하고 디자이너에게 연락했더니 참고한 게 맞다는 답변을 보내왔어요. 내가 어떻게 만든 책인데.. 한순간에 표절이라는 딱지가 붙은 불량품이 되었다는 생각에 분을 참을 수 없어 수습이고 뭐고 곧장 화장실에서 분노의 눈물을 한바가지 흘렸어요. 디자이너에게도 화가 났지만, 저 댓글을 단 사람이 어찌나 원망스럽던지요. 눈물을 흘리면서도 머리로는 댓글을 지울 방법이 없나? 라며 어떻게든 회피하려고 했어요. 얼마 전 크게 논란이 되었던 M출판사 K작가의 표절 논란에 거품을 물고 분노를 표출했던 제가요. 결국엔 전부 회수한 후 새롭게 표지 갈이를 해 사건은 일단락 되었지만 그 당시 바로잡을 생각보단 내 노력에 누가 되지 않을 궁리를 먼저 했던 스스로에게 부끄러운 기억, 불편한 감정으로 그냥 마음에 묵혀두었어요. 그냥 그렇게 묵혀두고 지내왔는데 오늘 야망백수 님 글을 읽으며 그 감정들을 낱낱이 수면 위에 드러내놓게 되네요. 아주 속이 다 후련합니다. 입사한 지 9개월, 시간이 흐를수록 책을 만들수록 자꾸 내 고생과 내 노력만 들여다보는 아직은 미성숙한 신입이네요. 앞으로 이보다 더한 일들을 숱하게 겪게 될 텐데, 이것만큼은 절대 흔들리지 않을 나만의 올곧은 가치관이 분명하게 있어야겠다는 생각이 드는 밤입니다.. 주절주절 푸념하게 해줘서 고맙습니다 야망백수 님.. 야망백수 제가 글솜씨가 모자라서 제대로 정리 못하고 길게 늘어놨던 감정들을 이렇게 담담한 풀칠러님의 문장으로 마주하니 저 역시 속이 후련해지네요. 고맙습니다. 내 고생, 노력에 제값을 쳐주고 싶은 마음이 드는 거야 휴먼인 이상 어쩔 수 없겠지요. 다만 일하는 내내 우리 모두에게 제값을 쳐주려는 마음을 부끄러워하지 않을 수 있는 행운이 따르길 바랄 뿐입니다. 언젠가 그 행운이 당연한 것으로 여겨지는 좀 더 행복한 사회를 만드는데 우리가 매일 하는 일이 조금이나마 보탬이 되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을 것 같습니다. 모두의 떳떳하고 행복한 풀칠을 위하여! 풀칠러 B
야망백수님 글은 짧은 소설같네요. 과몰입하면서 읽었습니다. 어제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라는 영화를 봤는데요. 제목에 있는 한 글자 단어 ‘악’ 그 자체인 이정재가 황정민을 추격하는 내용이었습니다. 황정민이 이정재 형을 죽여서요. (스포 아니고 처음에 뜨는 줄거리 내용..) 근데 여기서 든 생각은 황정민도 이정재의 형을 죽였으니 어떻게 보면 ‘악’ 그 자체인 사람인데, 황정민을 응원하게 되더라고요. 지키고자 하는 존재가 있기 때문이었죠. 그렇게 생각하다보니 악이라는 건 정말 종이 한 장 차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각자의 사연이 종이로 비유된다면 우리는 모두 누군가에겐 악이며 누군가에게는 선이라는 걸요. 야망백수님은 누군가에게는 악으로 비춰지는 ‘찢겨 발길’ 존재의 일부였으며(과장하자면) 동시에 동료들에게 커피를 사다준 선의 존재이기도 하잖아요. 상황에 따라서, 사람에 따라서 선택을 하게 되고, 그것에 대한 책임을 지는 건 당연하다고 생각해요. 그 선택이 틀렸는지 맞았는지는 그땐 모르고 오랜 시간이 지나서야 알게 되니까요. 그러니까 한 면으로만 감히 판단할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많은 고생과 감정이 느껴진 글이었습니다.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야망백수 제가 마냥 '찢어죽일 놈'만은 아니라는 사실에 위안이 되면서도 한편으로는 오랜 시간이 지나서 돌아봤을 때 제가 선이라고 생각하며, 혹은 입에 풀칠하려고 별 생각 없이 했던 일들에 후회나 부끄러운 마음이 남아있지는 않을까 걱정이 남네요. 저는 요즘 제 처지를 설명할 때 '하고 싶은 일만 하면서 먹고 살기 실험 중'이라는 말을 자주 하는데요, 어쩌면 하고 싶은 일만 하고 산다는 것은 누구에게도 악이 되지 않고 산다는 것과 비슷한 의미일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좋은 코멘트 감사합니다 풀칠러님. 풀칠러 C 첫직장을 고향에서 공무원으로 시작해서 1년 4개월 일한 후에 퇴직했는데요. 이유는 도시에서 직장생활하며 저녁에는 취미생활도 하고 자기개발도 하고 문화생활을 하고 싶다는 것과 기존의 조직에서 크고 작은 것에 대해 실망하여 다른 조직으로 가고싶었던 것이었어요. 퇴직하고 토익도 보고 오픽도 보고 한국사도 따고 나름 자소서도 30개 이상 써서 현재는 공공기관 체험형 인턴 중인데요. 출근한 지 한 달도 안 됐는데 조직의 생리를 파악했답시고 이런 식이면 또 이직하겠구나... 하는 생각을 하고 있네요.. 허허 이런 식이면 평생 계약직이나 하며 살아야 만족하려나요 ㅎㅎㅎ 마감도비 퇴직 후 이직을 준비하는 모습이 멋져요! 퇴사 후 도리어 더 알찬 시간을 보내시는 거 같아서 부럽고 또 응원하고 싶네요 저도 비슷한 고민 때문에 직장과 지역을 옮긴 사람으로서 새로운 곳에서도 아쉬운 점이 보이는 건 어쩔 수 없더라구요.. 달리 보자면 지금 계시는 곳이 글쓴이의 열정을 담을 만한 그릇이 안 되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을 해봅니다. 자신에게 맞는 자리를 찾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을 하는 게 나쁜 것만은 아닌 거 같아요. 세상은 넓고 그만큼 필드도 넓으니 언젠가 글쓴이의 능력과 목표를 담을 수 있는 좋은 기회가 찾아오리라 생각합니다. 늘 응원할게요! 우리들의 풀칠하는 이야기, 어떠셨나요? 저희는 여러분의 이야기도 듣고 싶어요. 일하면서 겪었던 경험, 늘상 끌어안고 있는 고민, 오늘 읽은 풀칠 레터에 대한 감상이나 의견 등을 아래에 있는 '나의 풀칠 이야기' 버튼을 눌러 자유롭게 남겨주세요😀 |
밥벌이 에세이 레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