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요번 주 풀칠 에세이 당번 야망백수입니다. 오늘의 화두는 ‘딜레마’입니다. 이걸 고르나 저걸 고르나 전부 만족스럽지 못할 때 딜레마에 빠졌다고 말하잖아요. 저는 오바 쪼끔 보태면 인생이 곧 딜레마 아닌가 생각한답니다.
따지고 보면 우린 매일 다양한 딜레마에 시달리고 있죠. 아침잠의 딜레마(아침잠을 잃거나 회사에서 깨지거나), 점심메뉴의 딜레마(먹고 싶은 걸 못 먹거나 눈치 없는 놈이 되거나), 윤리적 딜레마(인간성을 저버리거나 밥벌이를 때려치거나.)… 오늘 이야기엔 제가 (구)직장에서 겪은 윤리적 딜레마 한 토막을 버무려 봤습니다. 풀칠러 여러분들은 어떤 딜레마에 빠져 있나요? 원적외선 나노 한지 마스크필터와 K-악의 평범성 / 야망백수 1 ‘하루 300원 원적외선 나노 한지 마스크 필터’가 사기라는 게 밝혀진 건 일요일이었다. 내가 다니는 인터넷 쇼핑몰에서 한 주 내내 광고를 때린 마스크 필터가 알고 보니 나노도 원적외선도 다 개소리고 그냥 동그랗게 오려놓은 한지 쪼가리였다는 기사가 네이버 메인에 뜬 것이다. 그 기사엔 이런 베스트 댓글이 달려있었다. ‘이렇게 힘든 시기에 마스크로 장난질 치는 찢어죽일 놈들!’ 그날 밤, 자리에 누워 입사 한 달 만에 맞은 이 사태에 대해 생각해봤다. 아마 경찰서에 가게 되진 않을 것이다. “㈜000은 통신판매중개자로서 거래 당사자가 아니며, 입점 판매자의 상품정보 및 거래에 대해 일체의 책임을 지지 않습니다.”라는 마법의 문구가 있으므로. 회사에서 혼나지도 않을 것 같았다. 이제 막 키보드 치는 법 배운 신입인 나야 그냥 까라는 대로 깠을 뿐이고 팀 전체가 진행한 마케팅이니 실수라고 하기도 어렵다. 요컨대 나는 죄를 지은 것도 실수를 한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 왜 이렇게 찢어죽일 놈들이란 말이 가슴에 와 박힐까. 어쨌거나 ‘이렇게 힘든 시기에 마스크로 장난질을 치는데’ 일조한 게 맞기는 해서 였을까. 사기를 당한 입장에선 우리 회사, 그리고 내가 저희는 아무 잘못도 없는데요?라고 말한다면 그거야말로 피가 거꾸로 솟는 일일 것이다. 상한 음식을 샀는데 음식점에선 정육점 탓이라 하고 종업원은 ‘저는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인뎁쇼?’라고 반문하는 격이니까. 나는 차라리 '마스크 값을 30으로 나누면 삼백 원이 아니라 삼백이십몇 원입니다. 정말 죄송합니다!'라고 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한나 아렌트는 홀로코스트를 자행한 것도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인뎁쇼?’라고 말하는 평범한 사람들이었다며 이 같은 상황을 ‘악의 평범성’이라고 표현했다. 역병이 창궐하는 시기에, 공포심을 이용한 사기를, 평범한 이커머스 중소기업의 마케팅팀이 야근을 해가며 도운 상황은 그야말로 K-악의 평범성이 아닌가. 어쩌면 ‘찢어죽일 놈들!’은 K-악의 평범성에 희생당한 이들의 절규인지도 모른다. 공동체의 신뢰가 무너지며 내는 파열음이거나. 안되겠다. 나는 아직 잉크가 마르지도 않은 자소서에 선한 콘텐츠를 만들겠노라고 거창한 비전을 적어놓은 게 부끄러워서라도 기꺼이 '찢어죽일 놈'이 되어야 한다. 내일 출근하면 어떤 식으로든 책임을 지고야 말리라. 그렇게 자못 비장한 각오로 잠자리에 들었다. 2 하지만 다음날 출근한 회사는 평소와 똑같았다. 조금은 심각한 분위기가 감돌 줄 알았는데 그렇지도 않았다. 심지어 자사몰과 포털 여기저기 뿌려놨던 홍보성 콘텐츠들까지 언제 있었냐는 듯 깨끗하게 지워져있었다. 여기가 사기 마스크 팔던 곳이 맞나 싶을 정도였다. 평온한 분위기가 하도 생경해 팀장에게 메신저를 걸었다. “저 팀장님, 마스크 건 말인데요...” “아 상우님, 아마 곧 공지 나갈 건데요, 오늘은 팀원 다 같이 환불 처리하게 될 거예요 :)” “아 넵, 알겠습니다!” 그제서야 팀장의 모니터 앞에 놓인 그란데 사이즈의 스타벅스 테이크아웃 잔이 눈에 들어왔다. 이제 9시를 겨우 넘긴 이른 시간인데 벌써 텅 비어있는 잔은 이미 모든 일 처리가 끝났음을 짐작하게 했다. 그리고 사이렌의 엷은 미소와 올라간 입꼬리의 이모티콘은 이렇게 말하는 듯했다. ‘안도하라, 우리가 ㅈ된 건 아니니’. 애초에 나같은 부속의 부속품에게 책임을 질 권한 따윈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나는 그냥 닥치고 환불이나 열심히 해주기로 했다. 클릭. 전액환불 하시겠습니까? 예. 컨트롤 씨 안녕하세요 고객님, 불편을 끼쳐드려 정말 죄송합니다. 컨트롤 브이. 클릭. 환불. 불편. 죄송. 대충 500건 정도를 처리하고 앞으로 500건 정도를 남겨뒀을 때, 팀장이 메신저를 걸었다. 전량리콜 속 넘쳐나는 클레임을 보다가 드디어 누군가 책임을 져야겠다는 생각이 든 것일까? 그리고 그 희생양으로 나를 택해준 것일까? “상우님” “넵” “팀비로 스벅가서 아이스 아메리카노 여덟 잔만 부탁드릴게요” “넵” 3 엘리베이터에서는 사람 몇 명이 타있었다. 명찰을 보니 같은 건물의 00홈쇼핑이었다. 본의 아니게 대화를 엿듣게 되었다. P가 완전 박살났지. 왜 박살났는데. 그거 한지 마스크 있잖아. 걔 담당이라 완전 깨졌잖아. 그러고 보니 점심시간에 상품기획팀 사람들이 00홈쇼핑이 있어서 우리는 다행이라고, 덩치가 작은 게 이럴 땐 좋다는 이야기를 했었다. 우리 회사는 당신네들이 총알받이가 되었다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있는데 또 그 짝 안에서도 누군가는 박살난 동료를 보며 안도의 숨을 내쉬고 있다는 것이 어딘지 우습다고 생각하다가, 문득 그 박살났다는 P의 표정이 궁금해졌다. 아예 모르는 사람이지만 왠지 스타벅스 가는 길 흡연구역에 있지 않을까, 거기 있다면 바로 알아볼 수 있지 않을까 하고 생각했지만 그런 일을 일어나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그냥 아이스 아메리카노 여덟 잔을, 내 몫으로는 아침에 팀장 자리에 놓여있던 것과 같은 그란데 사이즈를 주문하고, 회사로 돌아와서 커피를 나눠줬다. 이제 이 커피를 마시며 남은 500여 건의 환불을 처리하다 보면 악의 평범성이고 책임이고 나발이고 빨리 끝내고 집에 가고 싶다는 생각만이 남게 될 것이다. 박살이 났다는 00홈쇼핑의 P는 몇 시에 퇴근하려나. 그란데 사이즈의 플라스틱 컵에 인쇄된 사이렌이 대답했다. 알게 뭐니? 그러게. 알게 뭐람. 얼음이 벌써 녹았는지 커피 맛이 밍밍하다. 컨트롤 씨. 안녕하세요 고객님, 불편을 끼쳐드려 정말 죄송합니다…. 파주 야망백수님의 날이 선 글을 읽으면서 통렬한 자기반성을 했습니다. 저 또한 연차가 얼마 되지 않았는데도 업무상의 효율(또는 1시간 빠른 퇴근)을 위해 숱하게 개짓거리를 해왔거든요. 수위 높은 썰을 하나 풀자면, 기자노릇을 하던 시절에는 업계 지인으로부터 푸념 섞인 전화를 받은 적이 있어요. 회사가 망해서 해고를 당했다는 내용이었죠. 입으로는 ‘아이고 어쩝니까!’라는 위로를 건네면서 좌뇌(이성 담당)로는 이 기사의 제목과 리드를 어떻게 뽑아야 하나 짱구를 굴렸어요. 변명하자면 당시에 제대로 된 취재처 하나 마련하지 못해서 기사거리가 몹시 궁했거든요. 제가 그 주제로 기사를 썼는지, 아니면 묵혔는지는 기억이 희미하네요. 가해자는 쉽게 잊는다는 게 저에게도 유효한 말이었을까요... 아매오 얼마 전에 실수를 했습니다. 외부업체 담당자와 통화 중 그만 급발진을 했어요. 저도 당황했습니다. 전조 현상도 있었습니다. 앞선 미팅에서 감정의 안전장치가 덜그럭거리는 소리를 분명히 들었거든요. 그래도 설마 했죠. 좋아하는 척은 못해도 싫어하는 티는 안 낼 자신 있었으니까요. 결과적으로 저는 저를 과신했고 설마는 어김없이 사람을 잡았습니다.
변명의 여지없이 경험 부족이죠. 그러고 보니 좋아하는 척 안 하는 걸 싫어하는 티 내는 걸로 받아들이는 게 사회란 사실도 더 직접적으로 다가오더군요. 아, 근데, 싫다. 정말. 이건 뭐라고 해야 할까요. 사회 생활의 딜레마? 경험 좀 더 쌓으면 해결될까요? 야망백수 님이 제게 준 스벅 다회용백에 인쇄된 사이렌이 대답하네요. 정신차려 이 각박한 세상 속에서… 마감도비 K-악의 평범성. 정말 웃프다고 밖에 할 수 없는 말이네요. 비록 업무의 연장선상이었지만 본의 아니게 누군가를 곤란한 상황에 처하게 하는 일. 그 일련의 과정 속에서 나의 책임은 어느 정도이고 나는 어떤 마음을 품어야 하는지, 나는 왜 이 일을 하는지 등의 질문들. 저도 불과 얼마 전에 겪었습니다.
그 당사자가 해명을 위해 저에게 몹시 힘없는 목소리로 전화를 걸어왔을 때의 심경이 기억나네요. 우리 모두는 지시를 내리기도 하지만 또한 지시를 받기도 하는 사람이라는 걸, 그리고 그 애환을 기억하는 게, K-악의 평범성의 근원인 동시에 해결책인 것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우리, 공감의 모서리가 늘 살아있는 사람이 되어요. ▲장마철 퇴근길, 잠시 비가 그친 하늘에 무지개가 비추고 있다. 풀칠러 A 와아아 마감도비님 글 너무 좋았습니다. 수요일 밤에 비 올때 듣는 플레이리스트를 들으며 듣기에 너무 적절했어요. 저에게 멋진 수요일 밤을 선물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직 축하드리고요 불행은 언제나 저에게 더 나은 자극을 준다는 생각을 해요! 불행할 때마다 그 어떤 긍정적인 피드백이 없을 거라는 생각을 하지만요.. 돌아보니 불행도 좋은 기억이더라-라는 걸 아는 순간 전 더 성장했다는 느낌을 받구요! 많은 응원 받았습니다 마감도비님 팬할래요 !!!!! 마감도비 이직 축하 정말 감사해요ㅠㅠㅠ 벌써 새 직장에 대한 불평불만이 조금씩 쌓이고 있지만 새로운 직장에서 제 자아가 무럭무럭 커가고 있는 거라고 생각하려구요! 두 번째 직장은 처음이니ㅎㅎ 이렇게 적응해가는 거구나 싶어요:)
과거의 불행을 긍정할 수 있을 때 우리가 한걸음 더 성장한 거라는 말씀 정말 좋네요. 남은 한주 저도 이 문장으로 버텨볼래요. 서로 좋은 팬이 되어주기로 해요. 이번 주도 화이팅입니다!!풀칠러 B
3회부터 퇴사와 이직이라니. 초장부터 히든카드를 꺼낸 풀칠 편집인 분들의 애환이 고스란히 느껴집니다. 그리고 이 뉴스레터의 톤앤매너가 확실하게 느껴지기도 한 주제 선택이네요.
그만큼 '퇴사'와 '이직'이 직장을 다니는(지금 안 다녀도 잠깐 쉬고 있는) 모든 분들과 조금도 뗄 수 없는 이야깃거리인 탓이겠죠. TMI지만 저는 사회생활 6년 차에 4번째 회사를 다니고 있는 풀칠러입니다. 모든 인사담당자들이 기피할만한 화려한 스펙을 갖고 있죠. 하지만 저는 이직을 꿈꾼다는 건 이 지옥의 구렁텅이에서 한 걸음 더 도약하는 길이라 (당당히)주장합니다.
풀칠러 분들의 성공적인 이직을 기원합니다. -파주님의 코멘트에 출연한 프로 이직러 '사회에서 만난 선배 J' -
아매오 저는 2년 차에 첫 번째 회사랍니다. 대충 세어보니 내년부터 매해 이직하면 '선배 J'님과 같은 코스를 밟을 수 있겠군요. 가만 있자, 그러고 보니 제가 알기론 파주 님도 만만찮은데...역시 초록은 동색인 건가요? 후후. J 님과 파주 님, 저와 세상 모든 풀칠러의 커리어패스가 튼튼한 아우토반이 되길 간절히 바랍니다. 피쓰.풀칠러 C 최근 자유를 만끽하고 있는 퇴직 한 달 차 되는 따끈따끈한 퇴직러입니다.
저같은 경우는 입사한 후 1년 반 쯤 이후부터 매년 그 시기쯤 퇴직을 꿈꿨었는데요.
첫 퇴사를 꿈꿨던 이유는 사수의 부재였던 것 같아요. 이러저러한 사정으로 입사 3개월차 이후로 사수가 없었던 저는 혼자 최적의 레이아웃과 작업 프로세스 등을 찾아가며 부딪혀가며 깨져가며 배워야했고, 그렇게 마냥 열정만 가지고 1년 반을 보내고보니 어느순간 사수 부재에 대한 현타와 한계가 느껴지기 시작하더라구요. 사수가 있었더라면, 혼자 3개월 걸려 깨닫고 배운 것들을 더 효율적으로 빨리 배웠을텐데.. '아 이런 것도 신경써야하는구나'하고 실수해서 문제가 터진 후에 깨닫는 일이 없을텐데..앞으로 내가 스스로 더 배울 수 있는게 있을까? 더이상 뭐가 맞는 디자인인지도 모르겠는데 어떻게 배우지? 사수가 있는 다른 회사로 이직을 하면 더 잘 배울 수 있지 않을까?하는 생각들이 결국 스트레스로 다가오면서 퇴사를 결심했던 것 같아요. 결론적으로 그 때 퇴사는 못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업무 시야도 넓어지고 짬바가 생겨서인지 좀 단단해졌어요. 나름 후회하지 않을 만큼 성장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도 여전히 신입에게 사수의 존재는 퇴사를 생각하게하는 큰 요인이 될 수 있다고 말씀드리고 싶네요ㅎㅎㅎ
그 다음해부터는 디자이너로써 디렉터로써 좀 더 크고싶다는 욕심에 이직을 생각했었다가 그 욕심을 해소할 수 있는 답을 찾지 못해 남았었고, 드디어 올해! 다행히 그 답을 찾기도 했지만 열정 에너지 고갈?인건지 업무에 대한 무기력함이 너무 크게 느껴져 퇴사하게 되었습니다. 3년 반이란 시간 동안 제대로 쉰 적 없이 열심히 달리다보니 퍼진 것 같아요..쉬는 지금은 긍정적인 성격 때문인지 일을 오래해서 미련이 없는건지 이직에 대한 불안감도 없이 너무 행복합니다(백수 쵝오><) 다른 분들은 적절히 워라밸(젤중요)을 잘 즐기시길😌😌
쓰다보니 정말 열심히 존버했다는 생각이드네요ㅎㅎ 지금도 마음속에 사표를 품고 존버하고 계시는 분들 모두 화이팅입니다! 파주 3개월 간 혼자 고군분투하며 가까스로 익혀낸 것들을 사수가 있었더라면 3주 만에 깨우칠 수도 있었겠죠. 하지만 사수 때문에 3일 만에 퇴사를 할 수도 있음도 기억하시길. 이미 사수가 불필요해 진 퇴직자 풀칠러님께 보내는 충격요법 위로입니다. 우리들의 풀칠하는 이야기, 어떠셨나요? 저희는 여러분의 이야기도 듣고 싶어요. 일하면서 겪었던 경험, 늘상 끌어안고 있는 고민, 오늘 읽은 풀칠 레터에 대한 감상이나 의견 등을 아래에 있는 '나의 풀칠 이야기' 버튼을 눌러 자유롭게 남겨주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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