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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월요일에도 퇴근길에 복권가게에 들렀다. 나보다 먼저 들어온 남자가 자동 5게임짜리 복권을 받아들고 떠나는 걸 좇다가 길가에 잠시 세워둔 그의 차에 눈이 간다. 벤츠다. 벤츠 끄는 사람들도 로또를 사는구나. 희망을 돈 주고 사야 하는 처지 안에서도 이렇게 차이가 나다니. 나도 로또 당첨되면 벤츠나 사볼까. 아니다, 앞코에 마크가 없으면 아반떼랑 벤츠랑 구별도 못하는 ‘차알못’ 주제에 무슨 벤츠는 무슨 벤츠. 하기야 내 인생이 벤츠랑 무슨 상관이 있겠어. 그러다가 갑자기 내 인생에도 잠시 벤츠가 머물렀었던 때가 있었다는 게 생각이 났다. 취업 전에 여행했던 산티아고 순례길에서였다.

순례길에서 만난 애나는 꽤나 ‘히피적’인 사람이었다. 전 세계의 사람들이 자동차를 끌고 다니는 이 시대에 굳이 굳이 몇 백 키로미터를 걷겠다고 모인 사람들이 있는 곳이니 히피스러운 것이 새삼스러울 것도 없긴 하지만 애나는 그 중에서도 단연 돋보였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순례자 사무소가 있는 생장이라는 마을에서부터 걷기 시작하지만 애나는 거기서 800km 떨어진 프랑스 리옹의 자기네 집 현관에서부터 걸었다. 마라톤 대회도 아닌데 시작 지점을 정해놓은 게 우습다는 이유였다(이런 저항정신이야 말로 히피정신의 정수라고 할 수 있다). 게다가 애나는 걷는 하루 종일 군인들이 군가 부르듯이 남의 눈치 따윈 보지 않고 우렁차게 노래를 불러댔다(히피는 뮤직을 사랑한다). 애나는 노래 하나에 꽂히면 질릴 때까지 그 노래만 파는 타입이었는지 늘상 같은 노랠 불렀는데 이 노래의 제목이 바로 벤츠였다. 우드스탁의 아이콘, 제니스 조플린의 메르세데스 벤츠.

애나는 좀 특이하긴 하지만 활기 넘치는 길동무였다. 나 같은 샌님도 기꺼이 록밴드의 세션으로 만들어 버릴 정도로. 우리의 무대는 이런 식이었다.

"오 주여(합창) / 나한테 사주지 않을래요(짝) / 멀셰디스 벤츠를(돌림노래) / 내 친구 들은 전부 포르쉐를 몰아요. 나는 보상받아야 해요(짝) / 내 평생 죽도록 일했고 도와 주는 놈들도 없어요(하이라이트, 진지하게 열창) / 그러니 주님(완급조절 중요) / 제게 사주지 않을래요 / 멀셰디스 벤츠를(관객 모드로 전환해서 열심히 박수)"

록스타를 따라다니면서 풍월을 읊다보니, 이거야말로 진정한 히피의 주제가라고 할 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얼마나 반 체제적인 가사란 말인가! 죽도록 열심히 일하고, 친구 도움도 받지 않았다는 이유로 조물주에게 벤츠를 요구하는 노랫말은 그 당당함 때문에라도 벤츠를 끌 자격에 대해 한번 생각해보게 만든다. 왜 성실하고 공정하게 경쟁에 임했음에도 벤츠를 끌 수 없는가? 어떤 물건들은 왜 그렇게 비싸야만 하는가? 우리는 터무니 없이 비싼 물건들을 보며 부러워하거나 자책할 것이 아니라 노력, 경쟁, 보상이라는 알고리즘이 제대로 작동하고 있는지 의심해 봐야하는 건 아닐까? 

로또 용지를 넣고 멀어지는 벤츠의 뒤꽁무니를 쳐다보며 한편으론 애나와 불렀던 메르세데스 벤츠를 생각했다. 묘하게도 기분이 조금 나아졌다. 심지어 약간 웃음이 나오기까지 했다. 노래의 반체제성이 울분을 조금이나마 환기해준 탓일까? 갑자기 모든게 우스워졌다. 주머니의 로또도 우습고 벤츠를 끌면서도 로또를 사는 사람도 우습고 그걸 바라보며 ‘나는 게으르고 무능해서 저런 건 못 타’라고 혼자 열폭했던 것도 우스웠다. 도대체 나한테 이렇게 가혹하게 굴어서 뭐에 쓴담? 벤츠 끄는 사람을 보고 능력 있다고 한다지만 그렇다고 해서 벤츠 못 끄는 사람보고 능력 없다고 하는 것은 논리적으로 오류가 아닌가. 내가 스스로에게 씌운 무능의 혐의가 오류일뿐더러 천박하기까지 하다는 생각을 하니 또 웃음이 났다.

이 천박함을 반성해보자는 생각으로 카카오톡 내게쓰기를 켰다. 방금의 깨달음을 최대한 명징하게 표현하려 애쓰며 몇 마디를 적어봤다. 내가 무능하고 게을러서 벤츠를 못 끄는 것이 아니다. 그냥 벤츠가 존나 비싼거다. 다른 버전으로도 적어봤다. 내 월급이 작은 것은 내가 무능해서가 아니다. 그냥 월급이 적은 것이다. 말장난 같지만 적고 보니 꽤 마음에 들었다. 불행의 가장 큰 부분을 덜어낸 기분이랄까. 여전히 막막하고 궁색하고 답이 안 보이는 인생이지만 다음 주 월요일의 퇴근길에는 로또 대신 떡볶이를 사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 이래서 사람들이 죽고 싶지만 떡볶이는 먹고 싶다고 하는구나, 싶었다.

산티아고 길의 떼창이 무척 인상적이어서 저도 물개박수 치면서 읽었습니다. 맞아요, 월급은 애환의 대상이죠. 시간 잃고 건강 잃고 인성 잃는데 이렇게 보잘 것 없을 수가. 월급날도 기쁘지 않은 저 자신을 보면서 세상 만감이 교차할 때가 한 두 번이 아닙니다. 로또를 사는 사람들도 모두 같은 마음이겠죠. 요즘 같은 때 졸부를 기대하는 사람은 없잖아요. 노후에 대한 안정감, 좋아하는 일을 하고 싶은 마음... 모두가 벼락같은 소박함을 바라죠. 요즘 ‘동학 개미’ 운동이 불면서 너도나도 주식 시장에 뛰어드는 걸 봤습니다.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는 ‘직장인의 미래’가 없다는 거였죠. 정확히 말하자면 지금 월급으론 미래가 보이지 않는다는 거겠네요. 야망백수님의 월급의 미래가 곧 우리의 미래는 아니라는 말, 두고두고 기억해봐야겠습니다. 

능력이란 무엇인가? 잘하는 게 있긴 한데, 남들보다 특별히 잘하나? 글쎄요. 모르겠어요. 정말 모르겠더라고요. 능력 어필도 일종의 꾸밈이지만, 어딘가 양심에 털나는 행위로 느껴졌어요. 그렇다고 안 할 정도로 무대뽀는 아니고요. 꾸미긴 했는데 저까진 못 속여서 자신있게 어필하지 못했죠. 여러모로 무능한 인간이 된 것 같았어요. 최근에 생각이 바뀌었어요. 능력이란 꼭 ‘남들보다 잘하는 것’만 가리키는 게 아니더라고요. 저를 알아봐주는 분들이 저를 알아봐주는 포인트는 ‘우리와 맞는 사람인지’에 더 가까웠어요. 물론 남보다 잘하는 것도 중요하죠. 둘을 잘 섞어놓은 게 한 사람의 능력 아닐까 싶어요. 그래서 요즘엔 자신이 무능한 게 아닐까 고민하는 사람 치고 무능한 사람은 없다는 생각을 해요.

불행, 로또, 떡볶이, 무능... 저와 찰떡 같은 단어들이 보여서 무척 반갑네요. 제 동년배들은 로또를 사는 행위를 그리 멋지게 바라보지 않던데, 제 생각은 조금 다릅니다. 묵묵하게 회사를 다니던 사원A가 월요일에 무단 결근을 하고 와서 화요일에 갑작스런 퇴사 통보를 했다고 상상해 봅시다. 그의 극단적 선택을 만류하며 상사들은 퇴사의 이유를 물어오겠죠. 그는 입가에 가벼운 미소를 머금고 대답합니다. "집에 좋은 일이 생겨서요." 세상에 이렇게 멋진 퇴사 사유가 또 있을까요. 저 또한 집에서 한 블록 떨어진 곳에 사람들이 줄을 서서 사는 로또명당이 있어서 가끔씩 오천 원을 쥐어들고 인생을 건 배팅을 하곤 합니다. 보장된 불행에서 사느니 보장되지 않은 행운을 사려는 마음입니다.

저도 재택근무 중입니다. 재택근무는 메신저 감옥입니다. 메신저 불빛이 반짝거리면 30초 내에 답변합니다. 안그러면 의심받는거같거든요. 이 글 쓰다가도 메신저에 답장하고 왔네요 ... 그리고 집중력이 흐려지는 것도 단점이긴 합니다. 확실히 날 지켜보는 눈들이 없으니 매우 자유롭고 자꾸 핸드폰으로 손이가요 손이가. 제 생각보다 더 빨리 재택근무의 시대가 도래했다는것에 놀라움을 느끼는 한편 이 모든 것이 타국에서 시발한(ㅎㅎ) 바이러스 때문이란 것이 통탄스럽습니다. 풀칠 여러분도 건강 조심하세요.

아, 메신저 감옥..(울면서 입틀막). 저는 이제 휴대폰 진동에 깜짝깜짝 놀랄 지경이에요. 재택근무, 정말 장단점이 너무 확실하네요. 출퇴근 시간 줄어든 건 못 잃지만 이놈의 판옵티콘은 제발 어떻게 해줬으면 좋겠어요^^ 코로나19가 물러가면(제발!) 우리의 일상은 제자리를 찾을 수 있을까요. 우리 그때까지 몸 건강, 마음 건강 잘 챙기기로 해요. 풀칠러님도 화이팅! 항상 건강 조심하세요!

저희 회사는 재택근무 없다고 못박고 시작했습니다. 집에 있으면 일 안한다고, 회사에서 일해야 일하는 거지 집에서 일하면 그게 일이냐는 소리까지 들었네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 어이가 없어서 그저 웃음만... 재택근무 하는 지인들로부터 재택근무하면 일이 잘 안된다는 말을 들어서 저 스스로도 '재택근무하면 일 안 할 거 같은데 어떡하지...' 라는 걱정을 하긴 했지만 오너 입에서 저런 소리를 들으니까 썩 유쾌하진 않네요. 하필 오늘은 태풍이 몰아치는 날이었습니다. 코로나에 태풍까지 뚫고 출근하는데, 우리나라는 좀비가 나타나도 출근할거라는 사람들의 우스갯소리가 진짜 현실일 거 같습니다. 에잇, 회사 망했으면 좋겠어요... 

기업의 총수들이 종종 리더십 특강을 들으러 가던데 말이죠. 모여서 무슨 작당모의를 하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직원을 잘 굴리고 싶다면 '청개구리의 마인드를 헤아리는 방법', '월급루팡 제대로 알아차리기' 같은 수업을 들어야 하지 않을까요? 하라면 뒤지게 하기 싫은 게 인간의 기본적인 심리일 텐데, 이를 역이용하는 것이야말로 리더십이 아닌가 싶네요.

저 또한 (태풍과 질병보다 상사의 눈치가 무서운) K-직장인 중 하나인지라 오늘도 꿋꿋하게 출근하고 있습니다. 회사가 망했으면 좋겠지만 한편으로 '그럼 내가 떡볶이, 족발, 곱창 사먹을 돈은 어디서 구하지...?'라는 두려움이 생기네요. 풀칠러 님, 함께 힘냅시다. 괴롭고 억울한 만큼, 잘 챙겨 먹읍시다 우리.

이 글을 읽고 있는 분들은 스트레스 관리 어떻게 하고 계신가요? 다들 제때 제때 스트레스 관리 잘 하셔서, 저처럼 고통받다가 스스로도 놀랄만큼 갑자기 퇴사하는.. 불상사가 벌어지시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에 애정을 담아 경험을 나눠봅니다. 모두의 유 잼, 노 스트레스 한 앞날을 바래보면서 :)  

풀칠러님의 스트레스-양동이 이론 인상적이군요. 우선 고생하셨다는 말씀부터 드리고 싶어요. 한 시절을 견뎌낸 사람에게 이 말만큼 위로되는 게 없더라고요. 너 고생했다. 내가 안다. 뭐 그냥 말뿐이라도요.

저는 스트레스 받으면 오만 데다 연락해요. 전화도 하고요, 카톡도 해요. 인스타 스토리 올린 친구들에게 하나하나 DM도 넣어요. 운 좋으면 만나서 맛있는 것도 먹고 술이나 커피 한 잔하면서 수다도 떨 수 있죠(코로나!!!). 저를 굴러가게 하는 에너지는 대부분 사람한테서 나오더라고요. 그러다 보면 알게 돼요. 나만 막막한 게 아니구나, 라는 걸요. 푸념의 규모를 키우자. 저희가 풀칠을 기획한 의도이기도 해요.

맥락은 쪼오금 다를 수도 있지만, 권여선 작가의 '안녕, 주정뱅이' 작품 해설을 쓴 신형철 평론가의 문장으로 이번 품앗이를 마무리할게용.

“애초에 가진 것이 없던 사람들이 만나, 없음을 나누며 버티고 있었기 때문에 유일하게 남은 어떤 것이 무너져내리더라도 그것은 결국 없음이 더 많아지는 상황이라는 것이다. 없음을 나누는 것이 사랑이니 그렇다면 둘의 사랑은 더 강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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