꽤 성의를 담아 리뷰했더군요. 노력이 가상했습니다. 여러 근거를 들어 교수님의 수업이 학과의 다른 수업과 어떻게 같고 다른지, 그렇다면 이번 수업은 교수님의 다른 수업과 어떻게 같고 다른지 설명했습니다. 마지막으로 만족스러운 점, 아쉬운 점, 개선이 필요한 점을 다시 한번 강조하고 끝맺었고요. 감히 교수님의 수업을 평가할 능력이 됐느냐 부끄럽지만 또 한편으로는 교수님 입장에서 생각해 봤을 때 충분히 가치 있는 피드백인 것 같기도 합니다.

무엇보다도… 좀 귀엽게 보시지 않았을까요. 수업에서 딱히 존재감도 없었던 학생이(해당 수업의 학점 또한 평균의 B+였습니다) 어딘가 느끼함이 잔뜩 묻어나오는 문체로 수업 리뷰만으로 2,000자를 채운 메일을 보내왔으니 말입니다. 모르긴 몰라도 아마 교수님께는 ‘이번 주 인상 깊었던 일’ 정도의 임팩트는 남겼을 듯합니다. 연간이나 월간 단위는 아니겠지만 딱 주간 베스트 정도. 물론 교수님이 말씀해 주신 적이 없으니 순전히 제 추측이긴 합니다만.

아무리 그래도 스스로를 너무 치켜세우는 것 아니냐고요? 아닙니다. 강조하려고 다시 말하지만, 아니에요. 왜냐면 저는 스스로를 치켜세우지 않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아니’라는 부정 표현이 겨누는 대상은 ‘치켜세우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라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네. 저는 저 메일을 쓴 제가 매우 낯섭니다. 수업과 공부를 진지하게 생각하고 몰입하는 모습. 현재의 제게선 찾아볼 수 없는, 완벽한 타인. 그렇기에 순수하게 감탄할 수 있는 것입니다.

물론 성과를 내지 못했다는 점에서(B+) 그다지 생산성이 좋지 않은 몰입이긴 합니다만… 제겐 손에 쥐는 것이 없더라도, 순수하게 과정 자체를 동기부여로 삼은 공부에 대한 동경이 있거든요. 그런데 어쩌면 그것은 가질 수 없는 것에 대한 막연한 동경이 아니라 언젠가 한 번 쯤 가졌으나 그때는 물론 지금도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한 그리움이었던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음? 너무 감상적인가요? 이번엔 인정하겠습니다.

요즘 중국어 공부를 합니다. 읽고 쓰고 말하고 듣고. ‘왜 하필 중국어냐?’고 묻곤 하시는데 사실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구체적인 이유나 목표를 꼽기 어렵거든요. HSK 점수를 따기 위한 것도 아니고, 비즈니스 회화를 익혀 중국 진출을 도모하려는 것도 아니며, 회화 능력을 일종의 스펙으로 활용해 커리어 점프업을 하기 위한 것도 아닙니다(오늘 ‘아니’라는 말을 자주 하네요. 머쓱;). 아이가 이유를 알고 언어를 배우지 않듯 저도 그렇게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우연찮게도 이것이 제게는 ‘순수하게 과정 자체를 동기부여로 삼은 공부’라는 경험으로 다가왔습니다. ‘엄마’나 ‘아빠’ 같은 기초 단어를 반복해서 읽고 쓰고 말하고 듣고 있다보면 맨주먹과 맨발에 엉성한 자세로 뛰어다니는 초보 캐릭터가 된 기분입니다. 한국어의 요령이 통하기는커녕 방해나 안 되면 다행인 상황에 승부욕이 불타올랐습니다. 물리적으로 많은 시간을 때려 넣어야겠다는 결심. 간만에 대중교통에서 단어집을 펴기까지 했습니다.

지난 주에 첫 단어 시험을 봤습니다. 가족과 생애주기 관련 단어였고 20문제 중 17문제를 맞혔습니다. 선생님과 함께 틀린 이유를 분석했습니다. 아예 발음을 잘못 알아 들은 것 하나, 부수가 비슷한 다른 글자와 헷갈린 것 하나, 획 하나를 잘못 그은 것 하나. 앞으로 단어를 외울 때 무엇을 조심해야 할지 조금 파악이 되더라고요. 이번 주에는 직업 관련 단어를 외우고 있습니다. 어쩐지 단어 하나 외우는 데 드는 시간과 반복하는 횟수가 줄어든 기분입니다.

사실 ‘외국어 공부’는 많은 직장인이 새해 계획 중 하나로 꼽는 자기계발 활동입니다. ‘별다른 이유나 목표 없다’고 해도 ‘그래도 열심히 사네’라는 답이 돌아올 수밖에 없다는 것을 잘 압니다. 실제로 ‘중국어도 이렇게 재밌게 열심히 하는데, 그래도 조금이나마 읽고 쓰고 말하고 들을 줄 아는 만큼 영어 또한 방치하지 말고 공부해야겠다’는 다짐을 하기도 했고요. 덕업일치라는 말이 보여주듯 취미와 업무역량 사이의 경계는 어쩔 수 없이 좀 흐릿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용성을 따지지 않고도 노력을 쏟을 수 있는 무언가가 있다는 것은 그가 가진 일상의 여유를 증명한다는 점에서 긍정적입니다. 저에게는 지금 중국어가 그래요. 실용성을 따졌다면 엄마, 아빠 같은 단어들 외우느라 수 시간을 쏟아붓는 비효율을 참지 못했을 거예요. 아마 ‘3개월 완성’ 따위의 카피로 무장한 강의를 뒤적거리고 있었을 겁니다. 그러고 보니 궁금하네요. 다른 사람들은 이렇게 누리고 있는 취미가 있으실지요.

저 또한 서론이 길었네요. 별다른 계기는 없었지만요. 최근에 저의 마음가짐이 조금은 달라졌다는 걸 체감하고 있습니다. 옛날에 망쳐버린 프로젝트를 복기하면서 그때의 저에게 뭐가 부족했는지, 그걸 극복하기 위해서 제게 어떤 공부가 필요한 지를 가늠해 보고 있거든요. 공부를 할 때 가장 중요한 게 메타인지라고들 하잖아요. 저는 제가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을 이제야 제대로 응시하기 시작했습니다. 남은 건 제대로 실천하는 일뿐이겠죠. 물론 이게 제일 어려운 일이겠지만요...

진짜 공부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저도 요즘 공부해야 한다는 압박감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데이터 분석 툴 공부를 더 이상 미뤘다간 가까운 미래에 짐을 싸게 될 판이라서요. 지난주 일요일 오후 4시엔 오늘에야말로 공부를 시작하고야 말겠다는 비장한 각오를 다지고 회사로 향했습니다. 그런데 막상 지하철역 앞 사거리에 서니 발이 떨어지질 않더라고요. 마음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봤습니다. ‘앞으로 계속 먹고 살려면 가서 공부해야지’라는 완강한 목소리와 ‘야채곱창 먹고 싶다’는 서글픈 읊조림이 함께 들리더군요. 그렇게 신호가 두 번 바뀌는 동안 우두커니 서 있었습니다.

미래에 베팅하지도 못하고, 현재를 만끽하지도 못하는 이 마음을 치료하려면 어떡해야할까요. 아매오님, 절 보고 있다면 정답을 알려주세요. 도대체 어떡해야 그런 사치를 누릴 수 있는겁니까. 네? 퇴사하셨다고요?

새해 첫 곡 트렌드를 전혀 몰랐어서, 부랴부랴 이전 재생 기록을 찾아보려고 했는데 전혀 못 찾겠네요. 샘 스미스의 언홀리를 들었던가? 등골 서늘... 그치만 뭐든 제 맘대로 멋대로 받아들이는 성격이라, 언홀리한 한 해도 썩 나쁘지 않을 것 같고요. 풀칠러 여러분 뭐든 원하시는 것 다아 이루시고, 무엇보다 건강한 한 해 되시길요!

‘언홀리’라니! 흥미로운 제목에 끌려 저도 들어봤습니다. 그루비한 리듬에 취해 몇 번씩 들었는데 말이죠. 파격적인 가사를 인지하고 나니… 모쪼록 풀칠러님의 올해가 무탈하기를 바라며,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별 얘기는 아닌데요. 전 20대 때는 시럽 안 들어간 커피는 쳐다보지도 않고 프라푸치노. 바닐라 라떼.이런거만 마셨는데 30대 들어서니 입맛이 바뀌네요.. 단게 안 땡겨서 아메리카노를 제돈주고 사마시는 날이 오다니.. 사람은 변하기도 하는군요 -지나가던 3년차 에디터 풀칠러-

사람 일이라는 게 어찌 될 지 모른다는 건 그런 사소한 변화에서 찾을 수 있는 거 같아요. 당장 저만 해도 스무 살까지는 회 맛을 모르고 살았는데 말이죠. 지금은 큰 광어나 방어를 보면 ‘맛있다’는 생각이 먼저 드는 날것 마니아가 되어버렸거든요. 앞으로 얼마나 더, 어떤 방향으로 변화하게 될지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니 인생이 조금은 더 재밌어지는 것 같습니다.

작년에 얻은 건 말끔하게 두 가지로 개괄되네요 이직과 함께 많이 오른 연봉, 그리고 노화와 각종 스트레스로 푹꺼진 눈 밑. 매년 새해의 작은 다짐 중 하나가 '현상유지는 하되 시술 항목 늘리지 않기' 였는데, 올해는 푹 꺼진 눈 밑을 보며 다짐에서 제외시켰습니다.

아무튼 새해입니다. 끝내주는 결심이나 큰 기대도 하지 않은 채 참 오랜만에 술집에서 카운트다운을 했어요. 아직 새해를 기대하는 앳된 얼굴들 사이에 부대껴 그 얼굴을 따라하려 애써보았습니다. 이른 귀가는 초라했습니다만 조금 들뜨기도 했습니다.

매주 좋은 글 발행해주시고 재미있는 코멘트로 삶을 덜 팍팍하게 만들어주시는 마감도비님, 파주님, 아메오님, 야망백수님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올해도 잘 부탁드립니다

끝내주는 결심이나 큰 기대도 하지 않은 채였다고 하시지만 여전히 들뜬 마음으로 귀가할 줄 아는 분인 만큼 한 해 한 해를 단단하게 알뜰살뜰 채워가실 것 같습니다. 담담하게 이야기 들려 주셔서 고맙습니다. 저희 또한 올해 잘 부탁드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