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님의 직업병은 무엇인가요? [풀칠 145호]

2023. 7. 5.

안녕하세요 풀칠러님. 이번주 에세이 당번 파주입니다. 한 주 동안 잘 지내셨나요?

이번 주 풀칠 주제는 '직업병'입니다. 제가 앓고 있는 직업병을 자각하며 한 번, 3년 동안 일을 소재로 한 편지를 쓰면서 단 한 번도 '직업병'을 다루지 않았다는 사실에 또 한 번 놀랐습니다. 저의 경우 인스타그램 DM이 도착했다는 알람이나 진동에 화들짝 놀라는 게 직업병인데요.

직업병에 관한 님의 이야기도 궁금하네요. 풀칠러님의 가지고 있는 직업병은 무엇인가요?

가끔 TV를 보는 게 우리에겐 공부라고 했던 선배의 말을 떠올린다. 갓 대학생이 되어 개론 수업을 듣던 우리에겐 그 말이 꽤나 신선하게 들렸다. 교수님이 읊어주는 이야기나 노트북보다 무거운 방송학개론에 박혀있는 글자만이 공부는 아니라는 말. 어쩌면 그게 정답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종종 했다. 온전히 그 한마디 때문은 아니겠지만, 그 뒤로 죄책감 없이 영상을 볼 수 있게 됐다.

몇 년의 시간이 흐른 뒤에 ‘TV를 보는 게 우리에게 공부’라고 말했던 선배는 지금 뉴스에 나와 온갖 소식을 전하는 기자가 됐다. 그러는 동안 나는 TV 시대를 자연스럽게 지나 숏츠나 릴스 같은 짤막한 영상에 서너 시간은 거뜬히 쓰는 도파민 중독자가 되어버렸다.

습관이 곧 그 사람이더라니. 요즘 내가 하는 일의 대부분은 내가 소비하던 스낵 컬처를 만드는 일이다. 30초가 채 되지 않는 영상이나 3초면 훑어보고 지나갈 이미지를 만드는 일들. 이런 소소한 콘텐츠를 만들기 위해 몇 주 전부터 유난을 떨며 준비하고 협업하는 사람들을 닦달해대곤 한다.

가끔은 이 디지털 공간 속 데이터 쪼가리가 뭐길래 하는 식으로 자조하며, 고작 이런 것들에 내 인생을 바치고 있단 생각에 억울함이 불청객처럼 들이닥치기도 하지만. 이제는 그런 감정의 값도 월급에 포함되어 있다고 믿으며 퉁쳐버리기로 한다.

문제는 마음의 결심만으로 해결할 수 없는 것들이다. 이를테면 DM이 도착했음을 알리는 진동이나 알람소리가 바로 그것이다. 파블로브의 개가 된 것마냥 누군가 나를 찾는 낌새가 보일 때면 일단 땀부터 흐른다. 물론 알람을 확인해 보면 별것 아닌 일이 대부분이지만 이미 무조건적 조건반사가 형성된 내게 그 사실은 조금의 도움도 되질 않는다. 하지만 알람을 OFF로 돌려놓을 수 없다. 알람을 끄는 순간부터 매분, 매초 알람이 울리는 듯한 불안감이 솟아나기 때문이다.

나는 이것을 일종의 직업병이라 여긴다. 어디선가 나를 찾는 스마트폰 알람이 울리면 두려움에 시달리는 것. 이 불안의 원인을 변명하자면 이렇게 말할 수 있겠다. 내게로 날아드는 DM에는 대개 강렬한 분노나 뿌리 깊은 불만이 담겨있기 때문이라고.

제품에 이물질이 들어가 있다거나(원래 그 제품에는 안에는 공이 들어있습니다^^) 왜 내가 이번 이벤트에 당첨되지 않았느냐 따지거나(추첨이라 저희도 몰라용ㅠ), 우리 동아리 행사에 다짜고짜 뭘 내놓으라는 식이다(고갱님 혹시 사이버갱스터세요?).

자리를 잡고 DM으로 날아온 답변을 찬찬히 읽고 있자면 마치 그것들이 꼭 사람을 향해 건넨 말들이 아니라, 챗GPT에 맡겨둔 질문을 찾아가려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들이 DM을 보낸 계정 뒤에 사람이 있다는 걸 망각한 것처럼 군다고 해야 할까. SNS 채널을 운영하기 전에는 미처 알지 못했던 것들이다.

이따금 분노에 타오르는 DM을 받는 날이면 나의 과오를 떠올린다. 몇 년 전에 상품이 잘못 배송 왔다며 날 선 컴플레인을 걸었던 탓일까. 아니면 이벤트 경품에 눈이 멀어 당첨 기준을 두어 번 되물었던 업보가 돌고 돌아 이제야 오고 만 걸까. 이런 생각을 하고 있노라면 21세기에도 여전히 권선징악이 유효하다고 믿게 된다.

이제는 다른 존재에 매서운 시선을 두지 않으려 노력한다. 한참이나 뒤늦은 깨달음이기는 하지만. 날마다 인류애가 닳아 없어진 메시지들을 받다 보면 인간미가 고파지기 때문이다. 이제는 저마다 각자의 사정이 있겠거니 싶다. 이 작디작은 다정함이 세상을 구하지는 않겠지만, 적어도 스스로를 파괴하지는 않을 거란 믿음이 생긴다. 기둥 뒤에 공간이 있는 것처럼. 어떤 곳이든 그 이면엔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이제는 잘 알기 때문이다.

아매오 : 의도치 않았지만 직업이 여러 번 바뀌었습니다. 그때마다 세상을 바라보는 렌즈라고 할까요? 조금씩 바뀌더군요. 물론 직업이 바뀌었다고 그 전의 경험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라 층을 쌓아 올리는 것이긴 하지만 어쨌건 가장 최근의 경험이 제 렌즈에 가장 큰 영향을 주었어요. 직업병이라…병인 줄 알았더니 습관이더라고요. 습관이 쌓이면 성격이 된다던가요? 어쨌건 직업을 통해 쌓은 경험이 저의 한 부분을 이루는 것은 분명한 사실인가봅니다.

마감도비 : ‘세상에는 참 다양한 사람이 있다.’ 많은 의미를 내포한 말이죠. 특히, 민원인이나 소비자를 직접 만나는 사람에게는 더 그럴 것입니다. 한번은 테마파크 산업 종사자에게 그런 말을 들은 적 있습니다. “공간 한복판을 걸어가던 아이가 넘어졌는데 그게 저희 잘못이래요. 보상해달래요.” 물론 시시비비를 가려봐야겠으나 분노와 불평, 원망의 불똥은 어딘가로 튀기 마련이고 대개는 그걸 맞는 사람들이 정해져 있다는 게 슬픈 현실이겠죠. 특히나 한국 사회는 유리벽 혹은 모니터 뒤에 있는 게 사람이라는 걸 잘 잊는 곳인 거 같아요. 결국은 다 사람이 하는 일인데 말이죠. 파주님의 글을 읽고 나니 저도 벽 뒤에 사람이 있다는 외침을 잊고 행동한 적은 없는지 돌아보게 되네요. 잘 읽었습니다.

야망백수 : 인플루언서도 연예인도 아니지만 종종 악플을 받고 있습니다. 대게 이런 내용입니다. ‘광고 좀 그만해’(이게 제 일인걸요). ‘이걸 누가 돈 주고 함’(그분들 덕분에 먹고 삽니다). ‘사기임’(사기 아닙니다…). 등등.

악플이 달린 날엔 저도 눈을 부릅뜨고 길가의 표지판들을 훑습니다. 저건 비문이고, 저건 띄어쓰기가 틀렸고, 저건 무슨 말인지도 모르겠어. 그러다 유리창에 비친 제 모습을 보게 되죠. 조금 전에 욕했던 표지판보다 더 꼴 보기 싫어서 황급히 고개를 돌립니다. 이 직업병적인 부끄러움은 어떻게 치료할 수 있을까요? 요양이 필요한지도 모르겠네요. 오늘 남은 연차가 몇 개인지 세어봅니다.

▲ 직업'병'

책 편집자 : 비문에 발작함.

콘텐츠 에디터 : 일단 저장함.

기자 : 남을 의심함.

퍼포먼스 마케터 : 자꾸 가성비 따짐.

여행기자 : 손목 부러져도 DSLR듬.

콘텐츠 마케터 : 광고만 보면 캡처함. (앨범에 스크린샷 비율 80%)

에디터 : 화장실에 앉아 있을 때도 안내문 퇴고함.

게임 개발자 : 게임하면 무조건 상점부터 들어감. (여긴 어떻게 뽑아먹나 탐구)

그 옆에 있던 게임 개발자 : 게임을 너무 많이 하게 됨.

*풀문조사는 매주 수요일 풀칠 인스타그램에서 참여하실 수 있습니다.

풀칠러A

청첩장을 드려야 되나, 말아야 되나 고민하던 게 엊그제 같은데 꽤 많은 시간이 흘렀네요. 한두달 전 7~8년만에 연락을 받은 선배의 결혼식을 다녀왔습니다. 모바일 청첩장과 함께 한통의 전화가 왔어요. 청첩장은 만나서 전달해야 하지 않을까 라는 고정관념에 잠깐 고민했지만, 저도 예전의 정과 추억을 안고 다녀왔습니다. 겸사겸사 다른 친구들과 선후배들도 만날겸. 저를 돌아볼 수 있었던 오늘의 풀칠에 감사드립니다.

아매오

다들 받는 청첩장이고 다들 가는 결혼식인데 나 혼자 이상한 포인트에서 진지해진 거 아닌가 조금 부끄러웠었는데 공감해주시다니 너무 기쁘네요. 감사합니다.

풀칠러B

악 이번 글 너무 재밌게 읽었어요. 아매오님 글은 담백하면서도 따뜻함이 엿보여서 참 좋아요. 제 결혼식에도 초대하고 싶은데(?) 이미 해버려서 아쉽군요.. 후훗

아매오

하객의 사전적 의미는 ‘축하하는 손님’이죠. 인생에 축하할 일이 어디 결혼뿐일까요? 풀칠러님에게 경사가 있다면 언제든지 불러주십쇼!

풀칠러C

풀칠 레터 처음 읽어보는데요, 이번 레터는 제 이야기인 줄 알았어요. 저도 성인ADHD 자가 테스트에서 10점만점(^^)이었고 관련 정보를 찾아볼수록 저 같아서 용기를 내어 난생 처음으로 정신과에 갔었습니다. 이것저것 물어보셔서 제 TMI를 남발했고.. 세 번째 방문에 약을 처방해주셔서 복용해주셔서 꾸준히 먹었는데 아무런 효과가 없더군요. "아 나는 ADHD가 아니라 원래 이런 사람이구나.." 하고 깨닫고 그 뒤로 발을 끊었습니다. 덤벙대고 집중 못하지만, 호기심이 많고 하고 싶은 것이 많은 나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려 합니다.

파주

나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려 한다, 라니. 손민수 하고 싶은 멋진 결론이네요! 저 또한 산만한 제 천성을 저주하기 바빴는데요. 한편으론 산책을 할 때마다 동네에 있던 아름다운 풍경이나 뽀짝뽀짝한 귀여움들을 발견할 수 있는 게 이 산만함 덕분이지 않을까 싶어요. ADHD 증상을 가지고 살아가기 쉽지 않은 세상이지만, 서로 응원하며 잘 살아가 봅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