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이번 주 풀칠 마감 당번 마감도비입니다. 한 주간 잘 지내셨나요?

이번 풀칠 주제는 ‘협상 실패’입니다. 말 그대로 최근 회사와의 협상에 실패한 제 얘기입니다. 중소기업 노동자가 새겨야 할 명언 중에 ‘예상은 하고 기대는 하지 마라’라는 게 있는데 이걸 지키지 못했네요. 아쉬움과 분노는 뒤로 하고 저는 이만 안녕을 고하려 합니다. 모두 응원해주시길. 여러분의 협상 이야기도 궁금하네요.

지금 직장을 다닌 지 3년 됐다. 나는 더운 여름에 긴 정장을 입고 경력직 면접을 봤고 그리하여 나의 전쟁은 언제나 여름이었다. 대표와의 개별 연봉 협상 자리는 해마다 돌아왔다.

저마다 연봉 협상 노하우가 있겠지만 내 경우엔 어떤 해에는 과묵했고 어떤 해에는 말이 많았다. 내게 돌아온 과실이 늘 잘 익은 수박처럼 알찬 것은 아니었으나 적어도 한 해의 결실을 맺는다는 점이 중요했다.

올해도 면담 날짜가 잡혔다. 평소보다 조금 늦은 날짜였지만 크게 개의치 않았다. 매도 먼저 맞는 게 낫지만 맞는 건 내가 아닐 것이다. 이렇게 생각했다. 한 해 농사가 나쁘지 않았으므로, 아니 솔직히 말해 가히 혁혁하다고 할 만했으므로 나는 지나치게 안도하고 말았다.

드디어 연봉 협상 당일이 되었고 대표와 나는 국가 정상회담처럼 반갑진 않지만 싫은 티도 낼 수 없는 순간에 접어들었다. 대표는 근황 토크를 시도하더니 의외의 말을 꺼냈다. 협상 시기를 바꾸자는 것이었다. 아니 게임을 하기도 전에 룰을 바꾸는 건 반칙 아닌가.

올해 초 면담 자리에서 팀장은 나에게 좀 더 많은 권한을 주겠노라 본인의 계획을 밝힌 터였다. 나는 더 많은 권한을 주겠다는 건 더 많은 일을 주겠다는 게 아닌가 하고 속으로 반문하면서도 어떤 보상이 뒤따르리라고 생각했다. 그 생각이 철저하게 외면당하고 만 것이다.

대표는 선심 쓰듯 약간의 보상을 언급했지만 이미 마음이 상할 때로 상한 터라 고까울 뿐이었다. 엄밀히 말하면 그건 작년에 주겠다고 슬쩍 말을 흘렸다 도로 주워 담은 그거 아닌가. 허탈감에 따지고 싶은 마음도 사라진 나는 입을 닫고 서둘러 사무실을 벗어났다.

협상이 틀어지자 그동안 별다른 불만 없이 해치우던 업무에도 분노가 쌓이기 시작했다. 더구나 회사에서 요구하는 일이 점차 많아지는 시기였다. 이건 이렇게 하고 저건 저렇게 해라 등등 지시가 내려올 때마다 속에서 불길이 솟았다.

그 일이 있은 후 며칠간 우울감에 빠져 살았다. 회사에 대한 배신감이 비릿한 자책으로 번졌기 때문이다. 내가 도비처럼 낮밤으로 일해 얻은 건 뭐지? 고작 이건가. 내가 순진하게 회사를 믿었기 때문에? 아니면 내가 능력이 부족해서?

3년간 얌전히 회사를 다니면서 소위 말하는 ‘잡은 고기’라는 인식을 심어줬기 때문이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들려오는 이직 제안이나 구인 소식에 해탈한 듯이 굴었기 때문일까, 아니면 딱히 회사에 불만을 표출하지 않고 속으로 삭혔기 때문일까 따위의 생각을 곱씹었다.

하루는 답답한 맘에 천변에 나가 뛰었는데 그제야 잡념이 좀 사라지기 시작했다. 열심히 일한 나를 탓할 게 아니라 약속을 지키지 않은 회사를 탓하는 게 맞다는 생각이 내 안에도 자리 잡기 시작한 것이었다.

“그래, 부족한 사람과는 만날 수 있어도 거짓말하는 사람과는 만날 수 없다는 게 연애의 철칙이지.” 사람으로 가득 찬

한강에 도착하면서 입 밖으로 터져 나온 말이다. 드디어 이별을 결심하게 됐으니 오히려 좋은 일이라고 해야 할까.

삶이 바뀌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 건 지난 봄부터였다. 돈은 부족하고 일은 많고 여유는 없고 몸은 여기저기 아프고. 상황이 달라졌으면 좋겠지만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고. 몸살을 앓듯 따뜻한 계절을 통과했다.

어쩌면 좋지, 이직을 해야 하나. 간간히 생각하다 바쁜 일정에 생각을 흘려보내기 일쑤였다. 너무 바빠 오히려 이직을 생각하지 못하던 아이러니한 상황이었다. 그러던 차에 이번 일이 일종의 쇄기를 박아준 것이다.

마음을 정리하고 여유를 가지니 오히려 내가 지원해 볼 수 있겠다 싶은 자리들이 점점 눈에 들어왔다. 그래, 결렬이 아니라 결별이다. 헤어진 연인에게 할 수 있는 가장 멋진 복수가 보란 듯이 잘 사는 것이라면. 리멤버 업데이트 순간을 기다리며 오늘도 이력서를 쓴다.

파주 :  언젠가부터 저마다의 사정은 있다, 라는 생각을 하면서 연봉을 후려치려는 인사팀의 저 양반도, 진상을 피우는 고객도 일정 부분 이해하게 됐습니다. 연봉협상을 적당선에서 선방하는 게 인사팀 직원으로서 일을 잘하는 것이겠거니 하고요. 물론 대부분은 약자인 우리가 패배하고 만다는 게 유감스러운 일이겠죠.

아마 영화 <헤어질 결심>에도 그런 대사가 있었죠. ‘왜 그런 남자랑 결혼했냐?’라는 질문에 ‘다른 남자하고 헤어질 결심을 하기 위해서’라고 답하는 말이요. 영화 속 상황과는 정반대지만요. 여기 이곳과의 이별하기 위해 다른 회사와의 만남을 꾀하는 것도 해봄직한 시도라는 생각이 듭니다. 매일 마감 시지프스처럼 치열하게 일하는 마감도비님의 새로운 이별을, 진심으로 응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