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커피 한 잔 하자는 말을 허투루 하지 않는다. 밥 먹자는 말도, 다음에 한 번 보자는 말도 마찬가지다. 반대로 그런 말을 들었을 땐 ‘선택적 눈치없음 모드’를 시전한다. 예의상 하는 말이란 게 뻔해도 내 마음에 드는 사람이면 냅다 받는다. 물론 그렇게 성사된 만남이 모두 유의미했냐 하면 그렇지 않다. 보통 그런 말은 예의상 하는 거니까. 그러니 뭉개지 않고 만나준다면 그것만으로도 감사한 일이다. 어디 보자…세 달 뒤에나 가능할 것 같다는 답을 들은 적도 있다. 나도 누군가에게 불편한 사람일 수 있다는 사실을 실제 상황에서 마주하는 건 매우 소중한 경험이다.
나의 인간관계는 대개 그런 식으로 형성됐다. 지인들이 내가 인싸 기질을 가졌다고 생각할 법하다. 하지만 좀 가까워지면 다들 같은 얘기를 한다. 생각보다 너는 주변 사람에 관심이 없구나. 처음엔 당혹스러웠다. 내가 그런가? 이젠 납득했다. 지금 와서 보니 이와 같은 성향 덕분에 여러 사람과 얕은 관계(일시적이진 않으나 그렇다고 영구적이지도 않은)를 유지하는 것이 어렵지 않았던 듯하다. 만남을 진지하게 여기는 태도와 사람에 관심없는 태도는 언뜻 모순돼 보인다. 다만 분명한 건 그 모순으로 인해 적정선이 맞춰진다는 사실이다. 자화자찬인가? 그냥 진술이다.
얕은 관계가 종합적으로 내 삶에 이득인지 손실인지 아직 모르겠다. 인간관계를 두고 이해손실을 따지는 게 속물처럼 느껴지기도 하지만 달리 표현할 방법이 없다. 이것은 일하는 시간, 잠자는 시간, 가족과 보내는 시간을 빼고 남은 극히 일부의 시간을 어떻게 쓸지 정하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무엇을 선택할지 고민하며 가장 효율적인 인간관계를 만들어 놔야 할 텐데. 내게는 얕은 관계가 너무 많다. 나이 먹으면 저절로 정리될 거라고. 다들 그렇게 얘기한다. 하지만 그건 싫다. 어중간하게 디졸브되는 것만큼 찝찝한 게 없으니까. 내 인간관계에선 내가 주도권을 쥐고 싶다.
‘일로 만난 사이’로 범위에 제한을 두면 나름대로 결론이 선다. 얕은 관계는 ‘이득’이다. 세상은 참 넓지만 딱 그만큼 좁기 때문이다. 다시 볼 일 없을 듯했던 사람의 이름을 뜬금없이 듣는 경우가 많다. 사회 생활을 하면서 보고 싶은 사람이나 봐야 하는 사람만 볼 수 없다는 걸 다들 알고 있을 테다. 그렇기에 이러한 사이는 상호협력적이다. 가끔 만나는 것도, 관계를 유지하는 것도 수월하다. 숨겨진 목적따위는 없다. 가끔 만나고 관계를 유지하는 것 자체가 목적이니까. 결과적으로 추가 소득이 발생하지 않기도 한다는 점을 인지하고 있으므로 ‘인맥’이나 ‘라인’과도 다르다.
그런데 이 공식은 어떤 식으로든 일단 관계가 맺어진 사람들에게 적용된다. 얕은 관계는 이득. 그럼 얕은 관계를 만드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그 중 가장 만족스러웠던 것은 ‘커피챗’이다. 커피챗은 내가 접한 ‘스타트업 문화’ 중에서도 긍정의 농도가 꽤 짙은 편에 속한다. 그 이름을 내세우면 얕은 관계를 만들려는 시도가 어렵지 않았다. 커피챗의 의미를 모두가 알고 있기 때문에 그것을 신청하는 사람도 신청받는 사람도 가볍게 여길 수 있다. 또 내가 가볍게 여긴다는 걸 저 사람이 알고 저 사람이 가볍게 여긴다는 걸 내가 안다. 덕분에 도저히 무거워질 틈이 없다.
가벼운 만남. 그 결과는 제각각이다. 가벼운 관계로 남는 게 제일 흔하다. 명함도 교환하고 페이스북 친구나 인스타 맞팔도 할 수 있다. 아, 요샌 링크드인이 핫하니 일촌도 맺어준다. 상대방을 태그한 게시물을 SNS에 업로드해 기존 지인들에게도 내 관계망에 새로운 사람이 추가됐다는 점을 알린다. 업계에 알고 지내는 사람은 (악명이 아니라면) 다다익선이다. 어디 가서 ‘어, 저 거기 아는 분 있는데…’라며 아이스 브레이킹하기 좋다. 서로가 서로의 스몰토크 소재가 돼 주는 것은 업계의 도리다. 소개팅 첫 만남에서 제일 먼저 꺼내드는 카드가 주선자 뒷담화인 것처럼.
또 다른 결과로는 ‘채용’이 있다. 규모가 작은 조직이 경력자를 채용할 때 특히 유용한 모델이다. 이런 조합일 경우 서류와 면접을 준비하고 진행하는 데 일정 수준 이상의 리소스를 들이는 것이 피차 섭섭하기 때문이다. 찐한 커피챗 한 번은 서류의 일부(나머지는 채용이 확정된 뒤에 받아도 된다)와 면접의 대부분을 대체할 수 있다. 구직자에게 불리한 지형 아니냐고? 얼마 전까지는 나도 그렇게 생각했다. 그런데 채용을 염두에 둔 커피챗은 대개 추천인을 한 명 이상 끼고 이뤄지기 마련이다. 보통 사측으로 기울어진 채용시장의 운동장이 커피챗에서는 꽤 보정되는 것이다.
얼마 전에 그렇게 이직했다. 그야말로 번갯불에 콩 볶아 먹듯 순식간에 진행됐다. 점심 얻어 먹으려고 만난 전 상사가 안 그래도 물어보려고 했다며 이러저러한 회사가 사람을 구하는데 커피나 한 잔 해보라고 했다. 알겠다고 연락처를 넘겼는데 그 날 저녁에 커피를 마셨다. 당일에 오퍼를 날리시더라. 앗, 제가 진지하게 생각하고 나오지 않아서요. 휴가를 다녀와서 말씀드려도 될까요? 나는 휴가 2일 차에 합류 의사를 밝혔다. 처우 협의도 금방 끝났다. 휴가 복귀한 날 현 회사와 이야기를 나눴고 퇴사일과 입사일을 확정했다. 여기까지 딱 일주일(휴가는 4박 5일이었다).
이렇게도 입사를 하긴 하는구나, 싶다가도 한편으론 불안했다. 나도 회사를 다 알지 못하고, 회사도 나를 다 알지 못하는 상황에서 휘뚜루마뚜루 이직한 건 아닐까? 물론 2시간 넘게 떠드는 동안 회사의 장단점을 가감없이 들었고 나 또한 장단점을 소상히 밝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숙고하기 위한 절대적인 시간을 가지지 않았다는 점이 어쩐지 찜찜한 것이다. 그게 완전히 해소되지는 않았다. 천천히 회사를 살피며(들은 것과 비교해가며) 할 일을 찾아가는(말한 것을 증명하는) 중이다. 어떻게든 되겠지, 싶은 마음으로 출근하는 요즘이다. 커피 한 잔이 만든 날들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