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련은 없다 [풀칠 165호]

2023. 12. 20.

📦미련은 없다 [풀칠 165호]

안녕하세요 풀칠러님. 이번 주의 에세이 당번 마감도비입니다. 오늘은 끝에 대한 세 번째 이야기로 찾아왔습니다.

이번 주 풀칠에서는 ‘미련’이라는 주제를 다뤄봤습니다. ‘끝’이라는 이달의 화두를 듣고 ‘끝내지 못 한 게 많은 한 해구나’라는 생각이 가장 먼저 들었거든요. 저에게 2023년은 고민이 많았던 만큼 아쉬움도 많이 남는 해였던 것 같아요. 여러분은 올 한 해 벼르다가 마침내 끝마치신 일이 있으신가요?

올해 거둔 가장 혁혁한 성과는 얼마 전 연차 소진과 함께 방문한 치과에서 ‘새로운 충치 없음’ 판정을 받은 것이다.

진료대에 올라 양손을 가지런히 모으고 사형 선고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충치가 없어서 별다른 치료는 필요하지 않겠다는 말을 들었을 때의 심정이란. 아픈 치과 치료를 받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에 그 순간만큼은 뛸 듯이 기뻤다. ‘그 많은 탕후루를 먹고도 용케 충치를 피했구나.’ 그리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남 몰래 메모장에 적었다. 올해의 성과. 충치 없음.

1년 365일이라는 시간 동안 잘 보전한 게 건치뿐이었다면 좋았을 텐데. 아쉽게도 올 한 해 보전된 것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가기 싫어 죽겠는 회사 속 내 자리도 여전하고 일회용 배달 용기와 택배 상자, 빨래거리가 쌓인 원룸도 그대로다. 올 한해를 돌아볼 때 진한 아쉬움이 남는 이유다. 풀칠의 핵심 주제이기도 한 이직이나 이사는 결국 치러보지도 못한 채 모든 게 그대로다.

나를 뺀 모두가 이직도 잘하고 이사도 잘하고 미래에 대한 새로운 그림을 그려나가는 것 같았다. 풀칠을 제외하면 어디 가서 고민을 속 시원히 털어놓을 곳도 없어서 잘 지냈냐는 미팅 상대방의 안부 인사에 소심하게 시간이 멈춘 것 같다는 자조 섞인 말을 하기도 했다. 그러다 내 말을 잘못 이해한 상대가 ‘그대로긴 뭐가 그대로예요. 조금 있으면 나이를 한 살 더 먹잖아요’라고 대답해서 내 심란한 마음에 더 불을 지피기도 했다. ‘한 것도 없이 나이만 먹었구나!’

이사는 아직 계약 기간이 남았다 치더라도 이직을 못한 건 가장 후회되는 일 중 하나다. 기회가 아예 없진 않았다. 몇 번 제안을 받기도 했고, 그 중에는 역시 이 업계는 글러먹었어 싶을 정도의 박한 제안도 있었지만 수평 이직으로는 나쁘지 않겠다 싶은, 고민이 되는 제안도 있었다. 결국 마지막에는 서로 의견이 맞지 않아 무산되기는 했지만 말이다. 그때 고집부리지 말고 그 조건을 받아들였어야 했나. 올해 해가 저무는 광경을 보며 가장 많이 한 생각이기도 하다.

30번이 조금 넘는 연말을 보내면서 이제는 그런 생각을 하기도 한다. 한국의 계절이 지금과 정반대여서 만약 12월이 여름이었다면, 낮이 길고 햇볕이 따갑기까지 한 날이 이어져 오랜만에 만나는 친구들과의 연말 모임에서 땀을 훔치며 시원한 맥주를 들이켠다면 한 해를 보내는 마음이 옷차림처럼 무겁지만은 않을 텐데 하고 말이다. 계절과 상관없이 한 해의 성과를 채점해 성적을 내려는 내 마음 탓이 가장 크다는 걸 알면서도 그렇다.

찬바람 앞에서 옷깃을 여미듯 울적해지려는 마음을 다잡으려는 데 마침 며칠 전 한 장의 연하장을 받았다. 손수 적힌 연하장이었는데 거기에는 ‘모두 다 만족스럽진 못해도 후회는 남지 않은 한해가 되셨길 바란다’는 문구가 적혀있었고 그게 약간의 마음의 위안이 되었다. 속으로 욕을 하면서도 마감을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했고, 전날 회식으로 너덜너덜해진 육신을 부여잡고 출근 지하철에 몸을 실었으며, 달리기를 더 열심히 하겠답시고 새 러닝화를 장만했다. 부지런히 달렸으니 어딘가에는 가닿겠지. 그게 올해가 아니었을 뿐. 올해의 또 다른 성과는 내년에는 좋은 일이 있을 거란 믿음을 버리지 않은 것일지도 모르겠다.

야망백수 : 2023년은 처음으로 1년을 통째로 직장인으로 보낸 한 해였습니다. 아마 큰 이변이 없으면 내년에도 올해와 비슷한 모양의 시절을 보내게 되겠죠. 마음 한구석에 변화가 필요하단 생각을 품고 있으면서도, 한 해가 끝으로 치닫는 와중에도 어떤 결심도 품지 않는 제가 마음에 들지 않는 요즘입니다.

그래도 마감도비님의 글을 읽으니 삶을 달력에 맞출 필요는 없단 생각이 드네요. 우리는 오직 현재에만 존재하고, 미래와 과거 사이의 현재는 늘 삶의 한가운데일 수밖에 없으니까요. 오늘도 삶의 한 가운데에서 수고 많으셨습니다. 모두 다 만족스러울 순 없지만, 후회는 남지않는 하루 보내셨길 바래요.

아매오 : 미련이 남는다는 것은 최선을 다했다는 것, 이라는 뻔한 소리도 지금처럼 한 해를 마무리하는 시기에 듣는다면 크나큰 위로가 됩니다. 그러거나 말거나 시간은 흐르고 우리는 또 새로운 한 해를 맞는다는 사실을 수십 년 간 반복해 학습한 결과지 싶습니다. 다가오는 한 해도 때때로 괴롭고 그것은 또 미련으로 남겠죠. 하지만 그런 것들로 쌓아올린 세계에 무엇보다 소중한 것들을 채워 넣을 수 있을 겁니다.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요. 끝이 다시 시작이다. 역시 하나마나한 소리지만 그래도 딱 한 번만 이 말을 내뱉을 수 있다면 연말인 지금이 적기일 겁니다.

파주 : 출근길에 -15도가 찍힌 스마트폰 화면을 보곤 ‘이거 실화인가’ 싶었습니다. 지난주까지는 봄이었는데 겨울이 왔음을 체감했어요. 그것도 살이 아릴 정도로 아주아주 매섭게. 진짜 연말인가 봅니다. 마음은 헛헛하고 뭔가 뚝 끊어지는 듯한 기분이 드는 걸 보면 말이죠. 하지만 다년간 경험해 본 우리는 알고 있지 않습니까? 해가 바뀌어도 우리는 여전하고 삶은 계속된다는 걸 말입니다.

12월이 여름이었다면, 그래서 시원한 맥주를 들이켠다면이라는 상상이 반가워지는 날씨네요. 제가 이룬 올해의 성과는 ‘이사’네요. 곧 새로운 집으로 모시겠습니다. 이가 시리는 날씨니까 맥주 대신 와인으로 가시죠. 내년이 없는 것처럼 마셔봅시다.

▲ 반등의 기회

풀칠러A

방어를 드셨군요! 한 해를 잊기 위해 먹는 회 그것이 망년회일지도 모르겠네요. 코 끝이 시린 게 바야흐로 망년회의 시즌입니다.

마감도비

제가 본 망년회의 정의 중 가장 탁월하네요. 그런 망년회라면 몇 번이고 좋을 텐데 말이죠. 날이 많이 춥네요. 건강 조심하시고 싱싱한 망년회 누리시길 바랍니다.

풀칠러B

리뉴얼 이후에 전체적으로 글이 더 읽기 쉬워지고 정갈한 느낌이 듭니다. 다같이 단기속성글쓰기지옥캠프(이런게 있을리가?)라도 다녀오신것같네요. 내년에 복직해야하는 직장인으로서 송년회를 건너뛰고 갈 수 있어서 맘이 편안하네요ㅎㅎ

파주

풀칠 멤버들과 리뉴얼 회의를 위해 성수동에서 만난 날, 오랜 회의 끝에 내린 결론은 ‘더 정성 들여 쓰자’라는 다짐이었습니다. 이런저런 기획을 시도해 보긴 했지만 역시 기본에 충실하는 게 최선이겠더라고요. 지옥캠프에 다녀온 것은 아니지만, 저희의 고민을 알아주신 것 같아 아주아주 기쁩니다. 다음 주제도 잘 써내야 할 텐데… 기분 좋은 부담감이 생기네요. 다음 호에도 힘주어 써보겠습니다.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풀칠러C

야망백수님의 글을 읽으며, 곧 있을 송년회, 망년회, 연말모임, 만찬회 등등에 대한 걱정이 다시금 찾아오네요. 이 불길함과 어두움을 극복하고자 저 또한 1년치 사진을 돌이켜봤는데 온통 아이 사진뿐이네요. 제가 없었던 것만 같은 2023년 이제 곧 끝이 보이는 것 같습니다. 꽤 장문이었는데도 강력하게 빨려들어가 헤어나지 못하고 재밌게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야망백수

저도 요즘 지난 1년을 돌아보느라고 사진첩을 뒤적거리는 일이 잦습니다. 저의 지난 1년에선 뚜렷한 주제가 보이지 않더라고요. 봄에는 새 사진이 좀 많고, 여름엔 나뭇잎, 가을엔 커피잔, 겨울엔 다시 살펴보지 않은 책의 페이지들. 먼 훗날 2023년의 저를 기억하긴 할지, 기억한다면 어떻게 기억하게 될지 전혀 감이 안 오더라고요.

아마 쉽지만은 않은 한 해였겠지만, 풀칠러님은 2023년을 선명하게 기억하실 수 있지 않을까요. 올 한 해 수고 많으셨습니다. 연말 모임이 많은 시즌이네요. 모임에서 뜻밖의 즐거움을 많이 많이 발견하실 수 있길 바라겠습니다!

풀칠러D

망년회의 '망'이 잊을 망이라는 사실은 매번 잊고 있다가 이맘때쯤 상기시켜주는 글을 보고서야 떠오르네요. 오늘의 글 말미에 "지금의 삶을 사랑할건지, 떠나버릴 건지" 라는 물음은 꼭 이지선다처럼 보이지만은 않습니다. 한쪽만을 취하지 않고 베컴처럼 "난 둘다"라고 답하고 싶기도 하네요. 좋았던 일들은 다시 꺼내어 반추해보고 보내주고, 나빴던 일들은 "너도 결국 지나갔지"라며 잊어버리되 '이것 또한 지나가리라'라는 교훈만은 잊지 않는 송년망년(?) 되시기 바랍니다.

아매오

자기 편한대로 생각해버리는 것이 미덕인 시기 아니겠습니까, 연말은. 좋았던 건 좋았으니까 됐고, 나빴던 건 이미 지나갔으니까 됐고. 연말을 잘 보내고 새해를 잘 맞는 방법으로는 최고죠. 풀칠러님도 그러한 송년망년(?) 보내시길. 새해 복도 많이 받으시고요. 그나저나 베컴의 “난 둘 다”라니…뭘 좀 아시는 분이시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