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실업자로 보내는 늦여름

2024년 여름, 세 번째 직장에서 퇴사했다. 근속 기간 1년 10개월.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회사 생활이었다. 회사 문을 열고 나온 세상은 미친 듯이 더웠다. 회사 밖은 냉혹한 겨울이라더니. 이건 더워도 너무 덥다. 5분도 안 되어서 몸 여기저기에 땀이 나기 시작했다. 온몸이 땀에 절여졌을 즈음 생각했다. 아 회사 밖은 지옥이라고도 하던데, 이번 퇴사의 테마는 지옥인 걸까.

쓰잘데기 없는 생각들이 이어질 때쯤 집에 도착했다. 부리나케 에어컨을 켜고 컴퓨터 앞에 앉았다. 오늘도 손은 버릇처럼 구인 사이트를 클릭했다. 생각 없이 스크롤을 내리며 구인 리스트를 쳐다보았다. 30대에 접어들어 겪는 첫 백수 생활. 이제 뭐 해 먹고 살아야 할까. 고민하는 사이 스크롤이 바닥에 도달했다. 창을 새로고침한다. 또 스크롤을 내린다. 대체 이 스크롤을 왜 내리고 있지? 어제도 보았고 그제도 보았다. 사실 다 본 구인 리스트다. 그럼에도 다시 들어와 리스트를 본다. 왜일까. 구인 사이트를 끄고 인스타를 켠다. 휴가철을 맞아 다들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는 듯하다. 이참에 나도 쉬어 볼까? 근데 백수 주제에 쉬는 게 맞나? 뭘 해야 하지?

직장을 내려놓자마자 한동안 보이지 않던 불안이 고개를 든다.

2. 불안 없는 삶을 꿈꿨던 20대

어린 시절부터 나는 위험 회피적인 인간이었다. 내가 감당할 수 없는 일은 건드리지 않았다. 통제할 수 있는 일만 하고 싶어 했고, 상황이 틀어졌을 때를 위한 대응책을 마련해 두려 했다. 두세 겹의 안전장치를 두어야만 조금은 마음이 놓였다. 학부생 시절 의심할 수 없는 학문적 토대를 찾는 토대주의자들에게 끌렸던 것은 아마 그런 성정 때문이었을 것이다.

토대주의자들에 대한 선망 때문이었는지, 타고난 성정 때문이었는지 나는 삶에서도 안정적인 토대를 원했다. 사회인이 된다면 탄탄한 토대 위에서 출발하겠노라. 몇 년 고생하더라도 나의 삶을 절대 흔들리지 않게 가꿀 수만 있다면 남은 생은 불안 없이 보낼 수 있으리라. 그런 꿈 같은 생각을 했다. 불안해지고 싶지 않다는 감각, 불안 없는 토대 위에서 살고 싶다는 마음은 당시 나를 추동한 가장 큰 원동력이었다.

대학생 때는 온갖 전공을 오고 가며 지식과 정보를 폭식했다. 철학, 음악, 정치학, 경영학, 경제학, 국제관계학까지, 매 학기 21학점을 꽉꽉 채우고 도강에 청강까지 했다. 그 시절에는 불안이 무지에서 온다고 믿던 시절이었다. 더 많이 알고 더 많이 이해할수록 두려움과 불안이 없어질 것이라 생각했다.

사회인이 된 후에는 돈이 불안의 원천이었다. 자연스레 직장은 불안을 잠재우는 효과적인 수단이 되었다. 빠르게 취업 시장에 뛰어들었고 회사 일에 몰입했다. 직장에서 잘 자리 잡으면 안정적인 삶이 되리라 믿었다. 언제 올지 모를 생활고에 대비해 월급의 대부분은 저축했다. 퇴사할 때를 대비해 2~3개의 프리랜서 일도 꾸준히 병행했다.

한때는 삶의 중심을 찾는 게 불안을 없앨 진정한 해법이라고 생각하기도 했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알고, 내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가치의 위계를 잘 확립하면, 삶의 정체성과 방향을 명확히 알게 된다면 그것이 안정적인 토대가 될 것이라고 믿었다. 그렇게 20대의 대부분을 보냈다. 늘 숨 가쁜 삶이었지만 이렇게 달리고 달려 탄탄한 토대를 세우면 나에게도 영원한 봄이 오리라고 생각했다.

3. 30대는 불안과 동행해 보기

30대를 맞이하고 문득 삶을 돌아보았다. 불안을 없애보려다 엉겁결에 이룩한 각종 성취가 훈장처럼 쌓여 있었다. 하지만 그곳에서는 지독한 피로와 공허가 함께했다. 불안을 원동력으로 사는 삶은 달릴 힘을 주지만 멈추는 힘은 주지 않았다. 무엇보다 어떤 노력도 불안을 온전히 없애지는 못했다. 10년을 바치면 무너지지 않을 토대가 마련될 줄 알았건만, 내가 어떤 사람인지 명확히 알고 이해하면 단단한 중심이 갖춰질 줄 알았건만, 불안은 무엇을 해도 없어지지 않았다.

불안하지 않은 삶이 가능할까. 어쩌면 나는 불가능한 싸움에 매달리고 있었던 것 같다. 수많은 실존 철학자들이 불안에 집중했던 이유는, 불안이 실존과 가장 닿아 있는 개념이기 때문이지 않을까. 누구나 영원한 봄을 꿈꾸지만 여름은 때가 되면 돌아와 더위로 삶을 짓누른다. 함께 오는 태풍은 삶을 흔들고 뒤집는다. 나룻배든, 범선이든 상관없이. 불안은 여름처럼, 태풍처럼 삶이 마주해야 할 필연적 불가항력인지도 모르겠다.

20대 내내 도착지를 바라며 노를 저었다. 하지만 애당초 도착지라는 건 존재하지 않았다. 삶은 도착지를 향한 여정이 아닌 노를 젓는 순간의 연속일 뿐이었다. 더위가 오든, 비가 오든, 태풍이 치든 그냥 노를 젓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었다. 불안은 없애는 것이 아니라 노를 저으며 익숙해지는 파도 같은 것이었다.

그래서 세 번째 퇴사는 불안과 함께 하기로 했다. 불안과 동고동락하고, 불안을 애정해 보기로 했다. 세상에. 말하면서도 어색하다. 10년을 적대한 존재를 갑자기 끌어안으려니 쉽지 않다. 불안과 친해지려면 뭘 해야 할까. 한참 고민하다가 구인 사이트 대신 대한항공 사이트를 켰다. 우선 직장 생활을 시작하고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여름휴가를 떠나보기로 했다. 늘 달리느라 삶의 뒷전에 넣어두었던 여름휴가, 어떻게 하는 것이더라. 뭔가 태풍 속의 나룻배 같은 휴가가 될 것 같지만 일단 해본다.

아매오 : 불안도 결국 계절과 같네요. 끝났다고 생각했지만 그것은 사실 끝난 것이 아니며 단지 지나갔을 뿐. 지나간 것은 반드시 돌아오죠. 그뿐인가요. 참 다양하고 뚜렷한 방식으로 우리를 괴롭히기도 합니다. 잠깐 방심하면 여기저기 쌓이는 꽃가루처럼, 존재만으로도 짜증을 유발하는 지하철 옆사람 체온처럼, 쓸쓸하게 떨어지는 나뭇잎처럼, 살을 에는 추위처럼. 이거, 동행할 수 있는 거 맞긴 한가요?

할 수 있습니다(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다만 동행이라고 표현한 것이 1년 365일 늘 곁에 있을 거란 인상을 주기도 하는데, 꼭 그렇지는 않더라고요. 막상 동행을 결심하고 나면 불안해지고 싶어도 불안해지지 않을 때가 기어코 찾아옵디다. 그러고 보면 불안이라는 게 참 제 마음대로 안 돼요. 하하. 오면 오는 대로, 가면 가는 대로, 심하면 심한 대로, 가벼우면 가벼운 대로 그때그때 잘 대응하며 살아아죠, 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