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금주의 에세이 당번 마감도비입니다. 한 주간 잘 지내셨나요? 아니, 올 한해 잘 보내셨나요? 어안이 벙벙하지만 벌써 12월이네요. 올 겨울은 만만찮게 추울듯하니 모두 옷깃 잘 여미시길 바라겠습니다. 날이 추우면 괜히 작은 일에도 더 서러워지곤 하죠. 저는 요즘 퇴근시간만 되면 상념에 잠긴답니다. 내가 이 일에 적합한 인간이 맞나 하고 고민을 해요. 풀칠러 여러분은 직업 또는 업무가 본연의 성격과 맞지 않아 힘든 적 없었나요. 있었다면 어떻게 대처하셨나요? MBTI 스타디움에서 요즘 가장 핫한 경기는 S와 N의 승부라고 하지만 요즘 내 하루를 가로지르는 고민은 I와 E의 경계에 서있다. 외향이냐 내향이냐. 답은 이미 나와 있다. 나는 사람이 정말 어렵다. 나는 I형 인간, 지극히 내향적형인 인간이다. 늘 낯을 가리고 사람 대하는 걸 조심스러워한다. 그리스 비극을 보면 주인공은 자신의 흠결로 인해 늘 일을 그르치지 않나. 비극도 이런 비극이 따로 없지. 말수가 적고 내향적인 성격을 가진 나는 어쩌다보니 늘 사람과 부대끼는 직업을 가지고 말았다. 어느 정도냐 하면 매일매일 새로운 사람을 만나 인사하고 밥을 먹고 전혀 모르는 외부 조직에 전화를 걸어 질문을 하고 때로는 생전 처음 보는 사람과 마주보고 앉아 내밀한 속내를 이끌어 내야 하는 일이다. 이름도 마감도비지만 마감의 8할은 사람의 이야기를 듣는 일이다. 물론, 서당개는 3년이면 풍월을 읊고 사람은 적응의 동물이다. 마감도비 노릇이 해를 거듭할수록 일이 조금 손에 익기도 한다. 한숨을 푹푹 쉬다가도 통화버튼을 누르면 상대가 부담스러워할 정도로 외향적인 인간이 된다. 잘 지내셨느냐, 요즘 일을 좀 괜찮으시냐, 못 본지 오래 됐다 등등 간간히 멘트 양념을 치기도 한다. 문제는 이런 너스레를 떨다보면 늘 결정적인 순간에 실수를 저지르고 만다는 것이다. 최근에는 전화로 온갖 너스레를 떨며 이제 연말인데 한번 봐야 하지 않겠느냐고, 내가 그쪽 회사 근처로 가겠다고 빈말을 내뱉다가 상대가 “저, 마감도비님, 저희 O일에 뵙기로 약속 잡지 않았나요?” 라고 말하며 헛웃음을 짓기에 “아아.... 그쵸, 그쵸. 제가 너무 설레서 그만. 하하, 하하하”라고 답했지만 정말이지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풍월에 너무 무아지경이었던 셈이다. 내 생각에 자의건 타의건 I형 인간도 E형 스위치 하나씩은 지니고 있는 거 같다. 사회생활용 페르소나와 비슷하지만 그거보다 좀 더 절박한 의미를 지닌다. 뭐랄까, 일종의 필살기 같은 거다. 소년 만화를 보면 천재들 사이에서 노력형 캐릭터가 딱 한 번 남들보다 더 강해질 수 있는 필살기가 있지 않나. 이걸 쓰면 너는 일시적으로 그 누구보다 외향적인 인간으로 변할 수 있다. 하지만 너의 수명은 절반으로 줄어들고 말 것이다... 과장이 심하지만 대충 그런 리스크를 가진 비기(秘技)라고 생각하면 된다. 나는 매일 필살기를 쓴다. 한낮에 어색한 사람들과 밥을 먹고 업계에 떠도는 소문, 전 직장 험담, 재태크 꿀팁, 사는 얘기를 하며 한참을 떠들고 웃는다. 빈말, 과장된 웃음, 어색한 몸짓, 정직한 침묵. 몇 번의 반복. 쓰나미가 여러 번 나를 휩쓸고 지나가면 하루가 모두 흘러가있다. 일행들과 길을 나서서 나란히 대로변에 서면 모든 극이 막을 내린다. “아, 네, 저는 이쪽으로 가려구요. 저기 택시 오네요. 조심히 들어가시고, 또 뵙겠습니다. 조심히 들어가세요!”
사람 좋은 미소와 정중한 허리 인사도 잊으면 안 된다. 그리고 돌아서면 어디 전봇대 옆 쓰레기봉투 옆에 잠시 쭈그려 앉고 싶은 심정이 된다. 아, 빈말을 너무 많이 했어, 티가 나면 어쩌지, 그 말은 하지 말걸 하는 생각이 머릿속을 가득 채운다. 그리고 그 모든 걸 압도하는 피로감. I형 인간도 사회 생활을 하면 E형 인간이 된다. 대신 그 찰나의 순간이 지나면 E의 모든 획이 I로 길게 줄지어 서면서 그 길이만큼 자괴감과 피로감도 길어지는 것 같다. 그래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엔 고민을 하게 된다. 다른 직업을 찾아봐야 하나, 내가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나랑 맞지도 않는 직업을 골라서 이 고생을 하고 있나 등등. 그런데 최근엔 재미있는 일화가 있었다. 거래처(라고 하자)의 누군가가 내가 미국 출장으로 간 줄 알았던지 몹시 걱정을 하는 것이었다. 플랑크톤인지 오미크론인지 하는 게 심해서 현지 상황이 안 좋다는데 나더러 미국에서 괜찮냐는 거였다. 금방 오해를 바로 잡았지만 I형 인간인 나는 그게 또 너무 고마워서 한동안 그 걱정을 머플러처럼 두르고 다녔다. 따뜻하게. I형이어서 사람으로부터 오는 타격도 크지만 동시에 수혜도 컸던 셈이다. 밥은 드셨어요? 목소리가 왜 이렇게 안 좋아요, 아프지 마세요, 저번에는 감사했습니다, 큰 도움이 됐어요, 고생 많으셨습니다, 편안한 저녁 되세요 등등. 아직은 어색한 미소 사이로 흘러들어와 나를 따뜻하게 채워준 말들이다. 그리고 한 번 들어본 말은 나도 다른 사람에게 하기 쉽다. 외향적 천재들 사이에서 노력형 외향형인 나는 과연 살아남을 수 있을까? 모르겠다. 그래도, 나에겐 필살기가 있으니까. 어느 순간엔 나도 가장 진심으로 외향적인 인간이고, 그 순간이 쌓여가고 있다는 생각을 한다. 그러니, 모두들 나의 진심을 받아줘..! 야망백수 :
얼마 전에 회사 동료들이랑 같이 밥을 먹었는데요, 물론 MBTI 얘기를 나눴지만 지나고 나니 기억에 남는 건 알파벳 4개가 아니라 제가 좋아하는 메뉴를 기억해 주는 것 같은 따뜻한 배려더라구요. 이런 걸 보면 '내 성격은 뭐 입네'하는 얘기들은 별로 중요한 게 아닌 것 같아요.(성격 테스트가 기승을 부리곤 있긴 하지만요) 스스로 ‘E’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혼자 있고 싶을 때가 있고 스스로 ‘I’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누군가에게 다가가고 싶을 때가 있으니까요. 서로의 생각을 읽을 수 없는 우리가 마주할 수 있는 건 언제나 상대의 행동이고요. 어쩌면 성격이란 내장된 소프트웨어보다 사람과 사람 사이, 매 순간의 행동으로 결정되는 관계의 온도에 더 가까운 것일지도요. 저는 이왕이면 ‘그 사람, 성격이 어떠어떠하다’가 아니라 ‘그 사람이랑 대화하면 따뜻하다’고 기억되고 싶은데요. 그러려면 ‘나는 이런 사람이야’라는 말로 성격 뒤에 숨어 관계를 가꾸려는 노력을 게을리하는 걸 정당화하지 않는 연습을 좀 해야겠네요. 마감도비님 표현을 빌리자면 ‘E 스위치’를 키는 일이 되려나요? 흠. 근데 스위치란 표현은 아무래도 좀 기계적인 것 같은데, 관계의 온도를 덥힌다고 하는 건 어떨까요? 조금 더 인간적으로요.
파주:
저는 외향형이라고 오해받는 지독한 내향형 인간인데요. 낯선 사람들 앞에서 아무도 궁금해 하지 않을 TMI(태몽부터 버거킹 아메리카노 구독 서비스를 이용한다는 이야기)를 떠벌리기 때문입니다. 제가 절대 철면피라서 그런 것이 아니고요. 찰나의 침묵을 견디지 못하고 이런 얘기 저런 얘기를 쏟아내고 마는 것이죠. 이런 지독한 버릇 탓에 적당히 친한 사람들과 만난 뒤에도 '나, 너무 헛소리 한 게 아닐까'하고 이불킥을 자주 갈기곤 합니다. 한동안 저는 밖에 나설 때마다 외향을 선크림처럼 발라야 하는 저의 성격이 저주스럽다고 자책했습니다. 그런데 한편으로 (외향을 꾸미는 내향형인간 만큼) 외향을 억눌러야 하는 외향형인간도 힘든 일이 많겠다는 생각이 스치네요. 사실 한국사회에서는 외향보단 내향의 덕목이 필요할 때가 많잖아요? '가만히 있으면 반이라도 간다' 같은 한국속담만 봐도 그렇죠. 참, 어느 쪽이든 다들 고생들이 많네요. 지금도 어디선가 저와 정반대에서 고군분투하고 있을 외향형 동지들에게 응원을 보냅니다.
아매오 : 성격에 딱 맞는 직업을 가진 사람이라도 일은 여전히 만만치 않은 과제일 거예요. 추측컨대 덕업일치가 실패하는 루트를 그대로 따라가지 않을까 싶습니다. "나도 일하면서 많이 바뀌었지...후...니넨 이런 거 피지마라..." 뭐 이런 느낌. 익숙하지 않으세요? 하하. 그러니까 이런 말입니다. 성격이든 취향이든 내가 하는 일의 기반을 이루는 건 맞지만, 적어도 일에 있어서는 '일하는 태도'가 그것들을 앞섭니다. 서로 간 영향을 주고 받되 성격에는 성격의 영역이, 취향에는 취향의 영역이 있듯 일하는 태도에는 일하는 태도의 영역이 있는 셈입니다. 자, 마감도비 님은 어떤가요? 제가 보기엔 자신의 일에 적합한 '일하는 태도'를 갖고 계신 것 같네요. by.야망백수 💬풀칠하랴 '나' 되랴, 참 여러모로 휩쓸리기 쉬운 바쁘다 바빠 현대사회. 오늘 저희가 보내드린 이야기들, 어떠셨나요? 저희는 여러분의 이야기도 궁금해요. 일하면서 겪은 일, 늘상 끌어안고 있는 고민, 오늘 편지에 대한 피드백 무엇이든 좋답니다. 아래 버튼을 눌러 여러분의 풀칠하는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지난 주에 보내주신 풀칠 이야기 답장은 여기에서 보실 수 있어요! 어이 거기 풀칠 멤바들! 자네들 혹시 이거 좋아하나...? 이번 주도 분골쇄신 🌾풀칠🌾 만드느라 고생한 야망백수, 아매오, 파주, 마감도비에게 김밥 한 줄 쏘고 싶으시다면 아래 버튼으로 후원해주세요🍚 풀칠러님의 따뜻한 응원은 저희가 계속 쓰는 데 큰 힘이 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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