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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크로매니징이라. 이 단어를 마주하게 되면 어쩐지 변명부터 하고 싶어 집니다. 아마도 그건 제가 누군가가 보기엔 하나하나 사사건건 꼬투리를 잡는 밥맛인 사람, 또는 편집증적인 통제광으로 보인다는 뜻이겠죠. 하지만-누구에게나 그렇듯이-제게도 입장이란 것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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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장. 서 있는 장소. 그래, 여기부터 시작을 해볼까요. 일단 서 있는 장소라는 말을 들으면 어떤 이미지가 떠오르시는지. 저는 꽉 찬 출근길 지하철에 어떻게든 몸을 들이밀 때가 생각납니다. 일단 객실 안에 들어서서, 발 디딜 공간을 찾아서 꿈틀대다가 자리를 잡고 서면, 아 여기가 내가 선 자리구나, 하는 실감이 밀려오는 것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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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철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 잠깐 잡담을 좀 하자면, 이번 주 출퇴근길에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읽었습니다. 소설가는 몸으로 하는 일을 하는 사람이고, 그 몸을 만들기 위해 달리기를 시작했다가 어느 순간 ‘달리는 사람’이라는 정체성이 본업인 소설가와 거의 동격에 이르게 된다는 얘기더군요. 이 얘기를 제게 적용해보자면 이대로 가다 보면 저의 정체성은 머지않아 ‘출퇴근하는 사람’으로 굳어지게 되겠단 생각이 환승역 에스컬레이터에서 들었습니다만-사실 이미 그렇게 굳어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출퇴근하면서 책을 읽는 사람’으로 굳어질 정도의 자유는 아직 남아 있습니다.흠. 이 얘기를 하려고 했던 건 아닌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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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자유였죠. 마이크로매니징에 대해서 얘기하려면 먼저 자유에 대해서 짚고 넘어가야 합니다. 자유라는 가치에 대해서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물론 좋다고 하시겠죠. 그러나 정말로 그렇습니까?
일 년쯤 전에, 꽤 도발적인 인터뷰를 본 적이 있습니다. 실리콘밸리의 아주 아주 거대한 회사의 한 CEO가 공개석상에서 한 말이죠. “직원들은 자유를 원한다고 말하지만, 사실은 자유를 원하는 것이 아니다.” 이 문장이 오래 기억에 남은 이유는, 그 말이 어느 정도는 맞는 말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정말로 자유를 원했다면, 자유를 진짜 최우선의 가치로 두었다면, 그들은 애초에 회사를 다니지 않았을 것입니다. 자유에 대한 선호는 있지만 그것을 선택하지는 않은 상태로 회사를 다니게 되면, 결국 툴툴거리고 불만이 많은 직장인이 됩니다. 저처럼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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툴툴거리는 직장인은 우연한 기회로 중간관리자가 되었고, 주어진 역할을 다하기 위해서 나름의 최선을 다했습니다. 하지만 최선을 다하면 다할수록 돌아오는 건 ‘마이크로매니징’을 한다는 평판뿐이더군요. 툴툴거리는 직장인은 혼란에 빠졌습니다. 그가 받아온 교육엔 다음과 같은 ‘규칙’들이 있었거든요.
하나. 너는 자유다. 따라서 남들도 자유다.
둘. 열심히 일해라.
관리자가 되기 전엔 1번과 2번이 나름 공존할 수 있었는데, 관리자가 되고 나니 1번과 2번이 상충된다는 것은 툴툴거리는 직장인을 굉장한 혼란에 빠지게 했습니다. 매일매일 출퇴근길에 진지하게 퇴사를 고민할 정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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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툴툴거리는 직장인에겐 다른 이들과도 마찬가지로 회사를 관둘 수 없는 입장이 있었죠.(네, 또다시 입장입니다.) 그래서 그는 회사 내에서 갖고 있는 모든 권력을 총동원해서, 어떤 ‘프로세스’를 기획하기로 합니다.
이 기획의 목표는 마이크로매니징을 한다는 평판에서 해소되는 것. 팀원과 직접 이야기를 하지 않고도 목표대로 일이 굴러가도록, 남의 논을 향하는 물길을 밤새 몰래 돌려놓듯이 의지의 물길을 티 안 나게 조정하는 것. 툴툴거리는 직장인은 곧장 스프레드시트를 켜고 작업에 착수합니다. 이 작업에 대해서 말씀드리자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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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왼쪽 열에는 회사의 목표가 위치합니다. 그 옆에는 해당 목표를 분해한 본부 단위의 목표가 놓입니다. 그다음 열에는 팀의 목표가, 그 옆에는 파트의 목표가, 그리고 그 옆에는 팀원의 이름과 함께 개인 목표가 나열됩니다.
팀원은 매주 금요일, 목표의 현황을 ‘스스로’ 입력해야 합니다. 그 옆 칸에는 그렇게 판단한 근거를 작성해야 하며, 근거는 반드시 숫자로 표현되어야 합니다. 이어서 다음 주에 해야 할 일과 그 일을 해야 한다고 판단한 이유를 문제 정의와 해결 방안의 관점에서 간단히 메모합니다.
마지막 열에는 팀장의 코멘트란이 있습니다. 코멘트는 주말 동안에는 작성되지 않습니다. 월요일까지 채워지지 않은 빈 칸을 바라보며 직원들은 퇴근합니다.
이 구조는 조직 내 모든 계층에 동일하게 적용되지만, 하위 계층이 상위 계층의 시트를 열람할 수는 없습니다. 예를 들어 팀원은 팀장 레벨에서 운영되는 시트를 볼 수 없고, 팀장은 그 위 레벨의 시트를 볼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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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론 이러한 시스템으로 업무를 진행하겠다고 공표했을 때, 툴툴거리는 직장인은 솔직히 겁이 났습니다. 상당한 저항에 부딪힐 것이라 예상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팀원들의 반응은 예상과는 정반대였습니다.
자신이 하는 일이 목표와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 명확해져서 좋고, 피드백이 오가는 창구와 주기가 확정되어 있어 오히려 편안하다는 반응이 주를 이루었습니다.
그렇다면 그동안 제기되었던 수많은 볼멘소리들, “저의 자율성은 어떻게 되는 겁니까?”라는 질문들은 사실 조금 더 세련된, 즉 조금 더 명확한 방식으로 통제해 달라는 요구를 동시대의 유행어로 표현한 것에 불과했던 것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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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근 시간이 되었습니다. 그도 퇴근을 했고, 이미 퇴근해 있던 애인과 집에서 만났습니다. 그들에게는 몇 가지 공통점이 있습니다. 회사를 다니고는 있지만, 커리어를 온전히 믿고 있지는 않다는 점, 진짜로 원하는 것은 따로 있다는 점 같은 것들. 그래서 그들은 비밀스러운 규칙을 세웁니다.
퇴근 후 두 시간은 ‘그걸’ 진짜로 한번 해 보자.
그들은 각자 장비를 챙겨 집 근처의 낡은 건물로 향합니다. 그의 장비는 책과 스케치북, 애인의 장비는 기타. 대로변에서 빗겨 난 뒷골목의 낡은 건물 앞에 도착합니다. 좁은 현관문을 당겨서 열고, 그는 2층의 스터디 카페로, 그의 애인은 지하 1층의 연습실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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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이제 저는 포근한 스터디카페의 은은한 조명 아래서 책을 읽고 있습니다.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 다음에는 어떤 책을 읽어볼까요. 오랜만에 『1984』는 어떨까요. 그 시대를 직접 살지는 않아서 확언할 수는 없지만, 정황상 1984년에 『1984』는 오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한편, 무라카미 하루키는 그즈음 소설가로 데뷔했다고 들었습니다.
지금은 2026년입니다. 『1984』는 먼 길을 돌아 도착하고 있고, 소설을 쓸 수 있는 몸을 만들기 위해 달리기를 할 시간은, 자유를 추구하는 개인들이 서 있을 공간은, 글쎄요. 아직 어딘가에 남아 있긴 한 걸까요?
아차차. 이런 고민들은 저 같은 너무나 ‘마이크로’한 부품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커다란 것이겠죠. 저의 입장이란 결국엔 매니징을 잘하는 것. 그러면서 동시에 마이크로매니징을 한다는 볼멘소리를 듣고 싶지는 않다는 것. 딱 그 정도일뿐이니까요. 아무려면 어떻습니까. 저기 귀여운 애완동물 같은 주말이 다가오고 있는데. |